[스크랩] 위안부자료사진
■ 일본군 '위안부'란 무엇인가?
일본군'위안부'란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위안소'로 연행되어 일제에 의해 조직적, 강제적, 반복적인 성폭행당한 여성들을 일컫는 것으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이들을 정신대라고 불러왔으며 '성노예(sexual slave)', '성폭력 피해자'라는 표현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잘 드러내주는 용어이지만 현재는 일본군 '위안부'가 그 당시 쓰이던 역사적 용어이기에 사용하고 있다.
일제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등을 비롯한 침략전쟁을 일으키면서 전쟁이 확대되고 장기전으로 들어가자, 일제는 통제되지 않은 강간에 의한 성병확산을 막고 군 감독 통제하에 군인과 '군위안부'를 둠으로써 군의 사기 진작 등 효과적인 군사 활동을 꾀하려는데 중요한 목적을 두고 군'위안부'제도를 만들었다.
일제는 군'위안부' 여성들을 자국민을 비롯해 한국,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라바울 등의 여성들을 동원하였으며 적게는 5만에서 30만으로 추정된다.
위안소는 일본군 문서상 '군위안소', '군인클럽', '군인오락소', 혹은 '위생적인 공중변소' 등으로 불렸다. 군'위안부' 여성들의 생활은 기본적으로 위안소 규칙이 적용되었다. 위안소 이용규칙에는 군의 이용시간, 요금, 성병검사, 휴일 등에 관한 세부사항까지 규정되어 있으며, 특히 위생관련 규정이 많았다. 그러나 이 규칙은 기본적으로 군인을 위해 제정된 것으로 군위안소는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이 기거하며 인권을 유린당한 공간이다.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 같은 해 12월 문옥주 할머니로 이어지며 나타난 수많은 피해자들은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들었던, 잔인한 실상을 낱낱이 증언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국내에는 200여명의 군위안부 피해자가 한국정부에 신고하였으며 100여분이 생존해계신다
■ 위안부 사진자료
상해지역에 있던 위안소 입구
전쟁 초기에 군이 직접 관리, 운영하였던 위안소를 대외적 비난을 의식하여
민영위안소로 관리운영체제를 변경하였다. 건물 간판옆의 3명의 간호부의 모습
성병검진을 받기 위해 몰려가고 있는 위안부들
1938년 12월 성병검진을 받기 위해 줄을 서서 들어가고 있는
위안부들 중 한복을 입은 여인(맨 앞줄)이 있다
버마지역에 있던 위안소 1
일본군은 점령지의 현지 여성들을 일본군을 위한 위안부로 강제동원 하기도 했다
버마지역에 있던 위안소 2
버마지역에 있던 위안소의 위안부들의 모습
중국 황화를 건너는 조선여자
공장취업인줄 알고 기뻐하고 있는 모습
위안소 다다미
비좁은 공간에 오직 잠자리만 있을 뿐이다
하남에 있던 위안소
군인의 뒤에 위안소 사용 규정이 적혀져있다.
위안부들의 모습
미군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조선인'위안부'들
일본군은 전쟁이 끝난 후 많은 경우에 여성들을 그대로 전쟁터에 버려두고
돌아갔다. 그래서 여성들은 그대로 미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되었다.
군인을 달래는 위안부
위안부들은 때로는 싸움에서 돌아온 일본군인을 위로하는 자리에 동원되기도 했다. 이때 이들은 일본 옷을 입기도 했다.
특별매전세면제표
경우에 따라 군인들이 이 면제표를 이용하는데 요금이 할인되었다.
면제표의 발행자는 주둔지 사량부 연대부관으로 도장이 찍혀있다.
미얀마 지역의 미군포로 수용소에서 심문받고 있는 조선인 위안부들
전쟁이 끝나고 미얀마에서 미군의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들은
미군에게 심문을 받게 된다.
중국 상해에 있던 위안소
나무 막사로 지어진 상해육군오락소. 각 방에 위안부를 한 명씩 넣어두고 군인들을 받게 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위안소 형태 외에도 중국인 집이나 상가를 이용하든가 전방에서는 천막으로 급조하여 사용하였다. 각 방의 문위에는 번호와 성이 적혀있는 사용하였다.
군표
위안부에게 지불되는 것을 이 군표가 대부분이었다. 이것은 전쟁이 끝나자
휴지조각이 되었다. 오른쪽에서부터 50전, 5엔, 1엔짜리 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