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조선 엽기 시리즈 6 - 이건 사극이 아니라 사기극이구나
6. 이건 사극(史劇)이 아니라 사기극이로다
몇 년 전부터 최근까지 사극이 많이 방영되는 추세다. 앞으로의 대세도 사극이 될 것 같은데, 역사를 쓰는 작가로서 매우 반갑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오류도 적지 않아 자주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예전에 있기가 높았던 「전설의 고향」 같은 드라마에서는 천둥이 먼저 울린 다음 번개가 치는 등의 오류가 적지 않았는데, 지금도 그리 다르지 않다.
모든 사극에서 시대를 불문하고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오류는 ‘촛불’이다. 큰 방에 초 하나를 켜자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밝아진다든가, 그림자가 여럿이나 생기는 것 따위를 지적하자는 것이 아니다. 촛불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의 형태가 19세기 중반에 서양에서 파라핀을 이용해 대량으로 생산한 것을 모방한 모델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양초라고 부르는 것인데, 양초가 어떻게 조선과 고려는 물론, 심지어는 삼국시대의 안방까지 환하게 밝혀줄 수 있다는 말인가, 과거에도 촛불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밀랍(蜜蠟)들을 재료로 하여 극히 소량만 생산되는 사치품이어서 대부분의 가정은 등잔을 사용했다. 조선도 크게 어긋나지 않아 주로 등잔을 사용하였는데, 기름을 사용하다보니 그을음이 나는 것이 단점이었다. 여유가 있는 집안에서는 그을음이 없고 냄새도 좋은 들기름 등을 사용했지만 서민들은 할 수 없이 조도(照度)가 떨어지고 그을음이 많은 저질의 기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양초가 보급되었어도 비싼 가격 때문에 그리 많이 사용하지는 못했다. 서민들에게 양초는 아무 때나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제사상을 밝히는 용도 이외에는 함부로 사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처음 서울 구경을 한 시골 양반이 어찌 하다가 양초를 구입하였다가 용도를 알 수 없어 백어(白魚)인줄 알고 국을 끓여 먹었다는 옛날이야기는 결코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석유가 들어온 이후에는 등유(燈油)를 사용하는 남포(램프)가 등장하였는데, 전기가 보급되지 않은 산간이나 오지에서는 1970년대까지도 남포를 사용한 집이 드물지 않았다.
다음으로 흔한 오류는 야전(夜戰)일 것이다. 사극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가 스펙터클하고 야성적인 전투 장면일 것인데, 우리의 사극에서는 이상하게도 주로 밤에 많이 싸운다. 이웃의 일본이나 중국의 사극을 보면 거의 야전을 치르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보면 그들의 사극이 옳다. 명령과 신호체계가 시각과 청각으로 제한되었던 과거에 밤에 싸우는 것은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어둠으로 인해 주변을 제대로 식별할 수 없는데다 깃발 신호를 볼 수 없어 진퇴가 불가능한 밤에 싸우는 것은 정상적인 지휘관이라면 가급적 피했을 것이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의 공성(攻城)이거나 우연히 마주친 조우전(遭遇戰) 및 상황을 반전시킬 목적의 야습(夜習)이 아니라면 야전은 절대로 피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이순신 장군이 전사했던 노량해전도 야전이었다. 이순신 역시 절대 야전을 회피했었는데, 그만 최초의 야전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해전(海戰)에서도 야전에서는 명령체계가 제대로 수행되기 어려웠다. 밝을 때 충분히 거리를 벌려야 조선 수군의 장점인 원거리 포격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는 밤에 적과 뒤섞여 근접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야전을 걸어온 일본군을 섬멸하기 위해 매복하여 백병전에 가까운 형태로 싸우다가 그만 적들의 장기인 조총의 사거리 이내로 근접한 것이 전사의 직접적 원인이었다. 전쟁의 귀신인 이순신이 왜 절대적으로 피해왔던 야전을 치렀는지 설명하려면 상당히 복잡하다. 백전백승과 무적불패로 역사에 길이 추앙되는 이순신마저 야전에서 전사하였는데 다른 지휘관들은 오죽하였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극에서 야전이 빠지지 않는 것은 구조적인 문제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제작비 가운데 인건비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극의 특성상 대규모의 인원이 필요한 전투 장면을 찍는 것은 큰 부담일 것이다. 내가 만일 제작자의 입장이라면 부족한 인원과 빈약한 장비를 감추기 위해서 야전을 택할 것 같다. 어둡기 때문에 쌍방의 병력 규모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데다 불화살을 쏘아 시선을 끌어주면 아주 효과 만점이다, 인원과 장비를 적게 쓸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제작비를 절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주변에 있을 수 있는 전봇대나 철탑 등의 현대적 시설물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도 큰 메리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점들을 고려하였을 때 사극에서 애용되는 야전은 제작자들의 애로사항이 입장이 충실히 반영된 의도적 오류가 아닐까 한다.
다음으로는 의도적인 오류의 형태 가운데 지나치게 흥미 위주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다. 일단 고구려와 대조영 관련 사극을 보자. 고구려와 당나라가 싸우는 장면에서 연개소문이 안시성에 나타나 지휘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반란을 일으켜 왕을 죽이면서까지 집권한 연개소문이 수도 평양을 비울 수 있겠는가, 박정희와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서울을 비우고 직접 최전방에 나가 싸우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느냐는 말이다. 게다가 지금의 탱크에 맞먹는 위력을 가진 고구려의 웅장한 개마기병(鎧馬騎兵)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것은 흥미를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라고 쳐도 대조영 관련 사극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죽창을 들고 싸우는 모습은 문제가 많다. 정규의 무기를 갖추기 어려웠던 유민들이 죽창을 만들어 싸우는 것은 당연해보일지 모르겠지만, 그 지역에서는 대나무가 나지 않았다. 실제로 고구려도 대나무가 생산되지 않아 화살을 만들 때 호시(弧矢)라고 하는 싸리나무를 사용했으니 유민들이 어떻게 죽창을 구할 수 있었는지 의아할 뿐이다. 그냥 몽둥이를 들고 싸우는 것으로 처리하면 될 것인데, 그래도 약간이나마 충실해보려던 의욕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었으니 과유불급(過猶不及)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외에도 주요 캐릭터인 걸사비우(乞四比羽)가 천문령 전투에서 전사했는데도 끝까지 생존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당나라의 여황제가 자주 측천(則天)이라고 거론되는데,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죽은 다음에 받은 시호이다. 죽지도 않은 여황제의 시호를 어떻게 미리 알고 부를 수 있다는 말인가,
조선이 무대가 되는 사극에서 자주 발생하는 오류는 주막의 등장이다.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술과 밥을 팔아 생계를 영위하는 주막이 등장한 것은 18세기 후반이며 19세기나 되어야 제법 성행하게 된다. 그 이전에는 장날에 솥을 걸어 국밥과 막걸리를 파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곡식이나 베로 셈을 치렀다. 조선 중기 이전의 주점은 말 그대로 술을 파는 집이었지 아리따운 주모가 술을 제공하는 유흥점이 아니었던 것이다. 16세기를 배경으로 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대장금’이나 ‘허준’ 등의 사극에 나오는 주막의 풍경과 엽전으로 셈을 치르는 모습은 몽땅 허구라는 말이 된다.
최근 절정을 이루는 조선 관련 사극도 오류가 많다. 성종이 어우동을 만나기 위해 궁궐 담을 넘어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찌 왕이 그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성종이 지나치게 여색에 탐닉하는 모습을 보노라니 색종(色宗)으로 불러야 타당할 지경이다. 성종은 오히려 어우동에게 사형을 언도하였으며, 주연급 캐릭터인 김처선(金處善)의 등장 시기도 고증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또한 세종이 어렸을 때부터 궁궐 밖을 나가 민초의 삶에 접근한다거나, 비밀스러운 조직에게 목숨을 위협당하는 등의 파란만장한 사건에 연루 된다는 등등의 전개는 너무 비현실적이다.
이번에는 무기에서의 오류를 말해보자. 대규모로 벌어지는 전쟁에서 장군의 고함으로 일사불란하게 지휘되는 것이야 그렇다고 치자, 조선의 마지막 시대를 묘사한 ‘명성황후’에서까지 조총이 심지가 타들어가야 발사되는 무기로 나타나는 데는 경악을 금할 수 없다. 그런 형태의 무기는 총통(銃筒)으로 분류되는데, 조선의 제식무기(制式武器) 목록에서 개인이 휴대하는 총통이 사라진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였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군이 보유했던 개인화기인 조총은 조선의 총통과 크게 달랐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발사 방식이었다. 조선의 총통이 심지가 완전히 타들어가 화약에 닿아야 비로소 발사되는 것에 비해, 일본의 조총은 방아쇠를 당기면 방아쇠와 연결된 집게에 물린 심지가 내려가 화약을 점화시키는 방식이다.
총통이 심지가 타들어가 화약에 닿아야만 발사가 되기 때문에 기다리는 시간이 긴데다, 갑자기 표적이 숨어버리면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에 비해 조총은 사수가 원하는 타이밍에 발사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총통과 조총이 실전에서의 활용도에서 큰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조선도 전쟁 중에 노획한 조총을 복제하여 실전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광해군 시대에 이르러서는 전원 조총으로 무장한 강력한 부대를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신식 조총으로 무장한 부대가 누르하치(奴爾哈赤)의 후금(後金)과 일전을 거루려는 명나라의 요청에 의해 파병된 적이 있었으며, 이후 효종(孝宗) 시대에는 후금의 후신인 청나라의 요청에 따라 러시아와의 분쟁인 나선정벌(羅禪征伐)에 투입되었다.
민간에서야 재래식의 총통을 보유할 수도 있겠지만 조선 말기의 정규군이 어찌 그런 구식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조총의 발사방식이 본래 그럴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벗지 못한 실무자들의 잘못에 의한 것이다.(심지어는 KBS가 심혈을 기울였다는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을 조준하는 일본군조차도 총통 방식의 조총을 가지고 있다)
사극에 등장했던 총이 황당했던 또 하나의 사례는 ‘다모(茶母)’에서 목격했다. 다모에 등장하는 총 가운데 손으로 노리쇠를 밀어 장전하는 볼트액션방식의 소총이 나타난다. 총구(銃口)에서 화약과 실탄을 부어넣어 장전하는 총을 전장식 소총으로 부르는데, 화약을 부어넣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켜 세워야만 했다. 초기의 형태에서 진보한 것은 발사 방식이었다. 총구에서 화약과 탄환을 넣어 장전하는 방식은 총이 발명된 이후 오랫동안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총구의 뒤쪽에 서 장전할 수 있는, 쉽게 말해 위험하게 일어서지 않고도 엎드린 상태에서 장전할 수 있는 후장식 소총이 나타난 것은 19세기 중반이었다. 다모의 시대 배경이 18세기 초반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무려 150년 가까이나 시대를 앞서 간 것이다. 게다가 노리쇠를 밀어 장전하는 형태로 보면 적어도 200년 이상을 앞서 있다.
그리고 사극에서는 화살을 맞은 장수가 대수롭지 않은 모습으로 뽑아내는 장면이 가끔씩 나오는데, 그것 역시 오류다. 일단 화살이 박히면 그리 쉽게 뽑을 수 없기 때문이다. 화살촉의 뒷부분에는 낚시 바늘 같은 미늘이 있다. 당연히 박힌 화살이 잘 빠지지 않기 위한 용도다. 사냥용 화살은 가죽을 상하지 않기 위해 미늘이 없이 뾰족하지만 전투용 화살은 그렇지 않다. 억지로 잡아 뽑으려 했다가는 주변의 근육과 혈관은 물론, 신경까지 엉망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두었다가는 움직일 때마다 화살이 지렛대로 작용하여 상처가 더욱 커진다. 결국 화살을 맞은 사람은 생명이 위태롭게 되는데, 우선 화살을 짧게 잘라낸 다음 기회를 보아 외과적 요법으로 제거해야 할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것도 관심을 가지고 보면 눈에 걸리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빈번한 오류 가운데는 포졸 복장을 꼽을 수 있다. 벙거지를 쓰고 검은 더그레를 걸친 포졸 복장은 거의 만능이다. 실제 포졸은 물론, 육군과 수군의 모든 병사들이 그런 차림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실제 고증을 보면 전혀 틀리다. 임진왜란 당시에 1진으로 상륙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 세례명 아고스띠뇨)를 따라 종군했던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저술한 고증에는 포졸 차림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묘사한 조선군 병사는 “단단한 가죽 갑옷을 착용하였고 유럽인의 모자와 같은 철모를 쓰고 있었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강철로 되어 있었으며 그 밖에는 무쇠로 되어 있었다”는 모습이었다. 가죽 갑옷을 착용하고 강철이나 무쇠 재질의 투구를 쓰고 있었다면 포졸보다는 장군에 가까운 모습이다. 무기와 전투 장면의 고증도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으니 그의 고증이 틀리지는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 밖에도 당시의 해전을 일복 측에서 묘사한 그림을 보면 포졸 차림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조선 전함에 탄 병사들은 전부가 갑옷과 투구로 무장하고 있어서 누가 지휘관인지 식별하기 곤란할 지경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화살과 총탄이 비 오듯 쏟아질 전쟁터에서 갑옷과 투구로 몸을 보호하는 것은 상식에 해당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고 옷의 기능 밖에 없는 포졸 복장으로 나가는 것은 죽으러 가겠다는 것이나 진배가 없다. 사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포졸 복장이 등장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상당수의 전투 장면이 밤에 치러지고 그나마 낮의 전투도 조폭의 싸움처럼 장군의 명령 한 마디에 우르르 맞붙는 것을 보면 정말 할 말이 없다. 과거에도 병과(兵科)가 세분되었고 전술운용에도 각종 신호를 사용했다. 총이 도입되기 이전의 정규전이 빠른 기동력의 궁기병(弓騎兵)이 사격을 퍼부어 적의 대열을 유린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상대방 역시 경기병(輕騎兵)이나 활로 맞서는 형태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오류의 범주에 넣기도 무안할 지경이다. 또한 예전의 포탄은 단순히 쇠로 만든 구체(求體)로서 운동에너지를 사용하였을 뿐인데, 그것이 폭발하여 사람을 날리고 전함을 격침시키는 것은 또 무엇인가? 그런 포탄이 떨어지자 몸을 던져 다른 사람을 구하는 장면은 비장하기는 하나 오류로 분류될 수밖에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런 형편에 조선의 전투 장면에 최강의 무기로 공인된 편전(片箭)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등을 따져서 무엇 하겠는가,
대부분의 사극이 정통을 표방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시트콤에 가깝다. 그것을 커버하기 위해 화려한 복식이나 다수 출연 등의 물량공세를 펴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본질이 달라질 수 있겠는가, 분장과 표정 등의 외피(外皮)로 전달할 수 있는 한계가 분명한데다 그것마저도 오류가 자주 발견된다면 애써 돈 들인 가치를 찾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관찰 했을 때 가장 문제가 많았던 사극은 단연코 「「불멸의 이순신」이다. KBS가 사운(社運)을 걸고 거의 1년간을 방영했던 제작비를 비롯한 모든 방면에서 사상최대를 기록했지만 왜곡과 오류를 엄청나게 많이 생산하는 불명예도 기록했다. 「불멸의 이순신」은 왜곡과 오류로 시작해서 그것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오류가 많은 것을 시상하는 어워드가 있다면 압도적인 차이로 그랑프리를 차지할 것이 분명하다. 일일이 지적하자면 책 한 권은 거뜬할 정도라서 중대하다고 판단되는 것 가운데 약간만 소개하겠다.
일본 측 인물 가운데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가장 많이 등장하고 배역의 비중도 크다. 그런데 극중에 나오는 와키자카의 삶은 완전히 날조된 것이었다. 와키자카는 전쟁 이전에 해적 생활을 한 적도 없었으며 이순신과 만난 적은 더욱 없었다. 게다가 노량해전에서 전사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정식으로 봉공한 다이묘(大名 - 봉록 1만석 이상의 대영주)였으며 일본으로 돌아가 천수를 누렸다. 내 말이 의심가면 그의 이름으로 검색해보라,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1554년에 태어나 1626년에 향년 72세로 사망한 것이 분명하다. 불멸의 이순신은 등장인물과 내용을 위시한 모든 것이 거의 그렇게 왜곡되고 비틀려 있다.
그리고 드라마에서 비중이 크게 다루어진 가운데 완전히 잘못 짚은 것 가운데는 면사첩(免死帖)이 포함된다. 드라마에서는 보자기 크기의 면사첩이“전하께서 면사, 즉 목숨을 보장하는 증표”라고 되어 있으며 이순신은 그것을 자랑스레 집무실에 걸어둔다. 그러나 면사첩을 발부한 곳은 선조(宣祖)의 행궁(行宮)이 아니라 명나라 지휘부였다. 면사첩의 용도는 이순신의 목숨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면사첩은 어쩔 수 없이 적에게 붙었던 우리 백성들이 이것을 가지고 오면 목숨을 보증하는 용도로서, 지휘권을 행사하던 명나라가 예하의 각 부대에게 보내 살포하라고 보낸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복수(複數)인 첩으로 표현한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선조가 이순신 개인을 사면하는 용도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다 못해 정신이 멍해질 따름이다.
왕이 특정인을 절대 죽이지 않겠다고 보증할 수 있는 규정이나 전례는 전무하다. 그 이전에 이순신에게 향하는 선조의 감정이 살의(殺意)에 가까운 증오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런 약속을 할 리가 만무하다. 이순신과 선조의 관계를 약간이라도 알고 있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한데도 그렇게 큰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면 오류의 차원을 한참이나 초과하는 것이다. 작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려 하면 역사물이라며 피해버리고 고증을 따지려 들면 창작의 자유를 들어 빠져나가는 모습은 어느 면에서 보아도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영화 「황산벌」이다. 사극을 말하다가 갑자기 그 영화를 끄집어 낸 것은 황당했던 기억 때문이다. 「황산벌」을 보았을 때 가장 눈길이 간 부분은 연개소문과 당 태종, 김춘추와 의자왕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였다. 그들이 각각의 언어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데, 사극에서 중국과 일본 사람들이 능숙한 한국어로 대화하는 장면에 익숙했던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후 김유신이 소정방과 만났을 때 김인문이 경상도 방언으로 통역하는 장면도 매우 흥미로웠다. 흥미위주의 영화지만 인물들의 고증도 비교적 정확한 편이었고 씹는 맛도 제법이었다. 야전이 전혀 없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황산벌에서 김인문과 김법민이 김유신을 ‘외삼촌’으로 호칭하는데 맞는 고증이다. 그들의 어머니인 김춘추의 아내가 김유신의 동생인 문희라는 것이 잘 알려졌기 때문에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김유신의 아내와 자식들이다. 김유신의 아내인 지소부인(智炤夫人)은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난 딸이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혼인동맹을 맺은 결과인데, 외삼촌과 조카가 결혼을 하였으니 둘 사이에 난 자식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던 화랑 원술은 김유신과 어떤 관계이며 또한 김춘추와는 촌수를 어떻게 계산해야 하는가, 원술과 김법민과 김인문에 이르면 골치가 지끈거린다, 예전에 삼국시대 관련 소설을 쓸 때 신라 왕가(王家)의 혈연관계를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이건 정말 사람의 족보가 아니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고려도 그리 다르지 않았는데, 그렇게 근친혼이 성행했는데도 우생학적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는지 자못 궁금하다. 물론 지금의 유교적인 사고방식으로 당시를 평가하는 것은 금물이겠지만,
특히 기억에 남았던 것은 백제와 신라 병사들이 서로의 사투리로 다투거나 '거시기‘에 얽힌 에피소드였다. 경상도가 고향으로 전라도 사투리가 생소했던 나에게는 안목을 넓힐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난 다음 쓰게 웃고 말았다. 영화에서 중대한 오류가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었다. 백제의 수도 부여는 충청도이며 황산벌 역시 충청도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의자왕을 위시한 백제의 주요 인물들과 장병들의 상당수는 전라도가 아닌 충청도 사투리를 써야 옳았다. 당나라 인물들이 중국말을 쓰는 등의 설정은 좋았지만 정작 사용해야 할 충청도 사투리가 실종되고 말았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사약을 곱빼기로 들이켠 것처럼 쓰게 웃을 뿐이었다.
기왕 그 시대를 말한 김에 한 마디 더하자,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할 수 있었던 숨은 원동력을 꼽으라면 단연코 음식을 추천한다. 내 고향이 그쪽이지만 경상도 사람들은 음식에 대해서는 정말 젬병이다. 경상도 사람들에게 음식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그들의 반찬은 거의 소금 범벅인데다 그나마 가짓수도 두엇에 불과하다. 김치에 이르러서는 정말이지 끔찍할 정도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길이 들었으니 야전(野戰)에서 나눠주는 조악한 음식도 군말 없이 달게 먹었을 것이다. 싸움도 우선 먹어야 하지 않는가, 군대 급식이나 집에서 먹었던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먹는 문제가 수월하게 해결되었으니 전력(戰力)을 유지하는 큰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가장 불리한 나라는 당연히 백제다. 황산벌에서 서로 욕질을 하다가 “우리는 밥 한 끼를 먹어도 반찬이 스무 가지가 넘는다”고 자랑했던 것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전라도에 가서 백반을 처음 먹었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접시가 포개지도록 계속 반찬이 나오는 것을 보고 너무나 놀랐는데, 옆에 있던 손님이 “반찬이 이게 뭐냐”며 타박하는 것이 아닌가, 괜히 시비를 거는 줄로 알았는데, 주인이 “미처 시장에 다녀오지 못해서 그렇다, 정말 죄송스러우니 다음에는 제대로 하겠다”며 용서를 구하던 기억은 아직도 쇼킹하다.
추신
서양에서 포경(捕鯨)산업이 크게 쇠퇴한 것은 석유 산업의 약진에 의한 것이다. 조명의 원료로 애용되었던 고래 기름에 비해 품질은 떨어져도 싸게 대량생산이 가능한 석유가 등장하자 포경 산업은 급격히 경쟁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모비딕에게 묶여 바다로 심연(深淵)으로 사라지는 에이허브 선장의 최후는 바로 포경 산업의 최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등유(燈油)라는 용어에는 그런 산업 전쟁의 결과가 가려져 있다.
추신2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군이 사용했던 주력무기인 조총의 본명은 뎃뽀(鐵砲)다. 최근에 막무가내인 사람을 무대포로 부르기도 하는데, 과거에 용맹만을 믿고 뎃뽀도 없이 마구 돌격하는 무사를 무댓뽀(無鐵砲)로 불렀던 것에서 연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