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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위안부(성노예)

권성영액션 2008. 6. 28. 18:43

출처 www.ko2ja.co.kr

 

 
일본은 태평양전쟁 때 한국과 중국 그 외 동남아시아에서 12세 어린아이부터 약 40세 여성 20여만 명을‘성노예(위안부)’라 하여 닥치는 대로 인간사냥을 하여 끌고 갔다. 일본은 이 여성들을 전쟁터 피에 굶주린 군인들의 성 노리개로 만들었다. 이것은 세계역사상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악랄한 일본국가가 저지른 집단 강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두 손으로 하늘을 가리듯 책임회피와 거짓으로 일관하고, 일본 특유의 축소지향과 죄의식 없는 역사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이는 칼을 마구 휘두르는 정신병에 걸린 스모선수를 이웃을 둔 것과 같은 형국이다.

 

 

 

들어가는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전과를 부풀리고 악랄한 호전성을 과시하기 위하여 전쟁터에서 죽은 군인은 물론이고, 살아있는 남녀노소 약20여 만 명의 머리,귀 그리고 코를 전리품이란 명목으로 처참하게 베어갔다. 그 전리품들은 지금 일본 교토 히가시구(東區) 규조(九條)에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전쟁의 신’으로 섬기고 있는 도요쿠니신사(豊國神社)에 코무덤(鼻塚)으로 만들어 났다. 일본의 이 같은 작태는 드라큐라백작도 무덤에서 기절초풍할 사건이요, 이 무덤을 바라 보고 있으면 피가 거꾸로 돌고 울분이 치솟아 목이 메일 지경이다. 이것은 일본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희대의 악랄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은 아시아 침략전쟁인 태평양전쟁 때에는 한국과 중국 그 외 동남아시아에서 12세 어린아이에서부터 약 40세에 이르는 여성 20여만 명을 ‘위안부’라 하여 닥치는 대로 인간사냥을 하여 끌고 갔다. 일본은 이들 여성들을 전쟁터 피에 굶주린 군인들의 성 노리개 즉, '성노예'로 만들었다. 이것은 세계역사상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악랄한 일본국가가 저지른 집단 강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두 손으로 하늘을 가리듯 일본섬나라 특유의 축소, 은폐, 죄의식 없는 역사모르쇠로 책임회피에 급급하고 있다. 이는 칼을 마구 휘두르는 정신병에 걸린 스모선수를 이웃을 둔 것과 같은 형국이다.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라는 자를 비롯한 일본정부는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위안부 사건 등 제반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의 항의에 대해 “이는 일본 독자적인 문화이므로 이에 대한 주변국의 이해를 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등 참으로 정신 나간 망발로 대신하고 있다. 

▲중국에 있던 위안소(‘나눔의 집’ 캡쳐)

이 말은 일본이 주변국들에 대하여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망나니 짓을 하고도 우리가 하는 짓은 모두 옳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든 너희들은 관섭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던가?

(※'위안부'라는 용어에 대하여 단어적 해석을 하면 편안하게 위문하는 여성이라는 뜻이다. 즉 일제가 그들의 악랄한 처사를 은폐하고 조작하기 위하여 당시 강제 동원한 여성들을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의미로 좋게 조작하여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위안부'란 당시 일왕의 명령하에 악랄하게 강제적으로 납치된 '일본군 성노예'였다.따라서 이하 이들 여성들을 '일본군 성노예'로 표현함이 타당하다고 사료되어 향후 '성노예'로 기술하고자 한다. 이들 여성들의 문제를 다룬 '국제여성법정','유엔인권기구'에서도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위안소의 탄생

1868년 조작된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소위 121대 일왕 고오메이(孝明)의 독살로 시작된  메이지 쿠데타는 철학의 깊이가 없는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비롯한 하류 사무라이들의 난(亂)이었다. 이는 300여 년 간 지속되어 오던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의 ‘평화의 시대’를 거부하고 ‘살(殺)의 시대’를 선택한 것이다. 메이지 쿠데타는 일본에 있어 근대화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세계 역사상 가장 잔혹한 작태가 집중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세계는 불행의 시작이기도 했다. 또 오늘날 일본의 보통 국민들이 역사치매에 걸려 이웃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우리식으로 살면 그만이다는 식의 안하무인으로 변하게 만든 출발점이었다.

수천 년간 일본의 스승인 한반도와 중국 諸 아시아 국가들을 ‘터럭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악우(惡友)’라고 비하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은 무지몽매한 이들에게 더욱 살인에 광분하도록 상승작용을 하였다. 또한 이들 3류 사무라이들은 그들의 무지몽매함을 숨기고 일본 국민들을 전쟁과 살인의 광풍으로 몰기 위하여 300년 전 임진왜란을 일으킨 살인의 화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전쟁의 신’으로 승격시키기 위하여 도요쿠니신사 중건 작업도 병행하였다. 이러한 이들은 대외적으로 1895년 청일전쟁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피를 부르기 시작했다.

피에 물든 일제는 1932년 중국 상해를 침범하여 이른바 상해사변(上海事變)을 일으킨다. 상해를 침범한 일제는 일본군들의 사기 진작책으로 1932년 1월 28일 상해 홍구(虹口)에 일본군이 직접 운영하는 최초의 위안소 '다이사룽(大一沙龍)'를 설치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1차로 한국 여성 80명과 일본여성 24명을 성 노리개로 착취한 사실이 중국의 한 역사학 교수에 의하여 밝혀졌다. 그리고 38년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 사건 때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극악무도한 학살과 민간인 강간사건이 반일감정으로 번지고 국제사회 지탄의 대상이 되자 그 수습책의 일환으로 위안소를 서둘러 설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위안소는 일본군 내에 널리 일반화되기 시작되었다. 아시아침략전쟁 때에는 최악의 상태가 되었다. 우리의 꽃다운 어린 여자들은 피에 물든 야수들의 성 노리개로 전락되어 피의 광풍에 피지도 못하고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시아침략전쟁 당시 일제는 노동력 부족을 메운다는 미명아래 악랄하게 강제 동원한 여성들을 근로정신대(勤勞挺身隊)라 부른다. 이들 여성들 중 대부분은 군 성노예로 강제 동원되었다. 일제는 성노예 여성을 동원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군.관.민 합동으로 군수공장. 간호보조·군부대 잡역·여자 특수군속 등으로 취직 또는 일본유학 등의 갖은 감언이설을 동원하였다. 또 조선의 지도급 인사들을 내세워 "나라(일본)를 위해, 일왕을 위해 우리의 딸을 바치자"라고 선동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발적인 참여가 저조하자 일제는 10가구 단위의 '애국반'이라는 것을 조직하여 시골 구석구석까지 필요한 인원을 이 잡듯이 인간사냥에 나섰다. 또 각 마을의 구장(지금의 이장)들이 조선인 부녀자 현황을 파악하고 명단을 작성하여 이를 근거로 성노예로 강제 동원했다. 이러한 사실은 2004년 7월 국가기록원이 일제시대 45만 건에 이르는 판결문을 새로 분류,정리하는 과정에서 성노예 모집 상황 등을 가늠하는 판결문 9건에서 밝혀졌다.

당시 인간사냥에 나섰던 일본인 교사와 관련인들 증언에 의하면 초등학교에서는 일본인 교장과 교사를 중심으로

                        ▲12~16세 어린소녀들로 구성된 정신근로대(‘나눔의 집’ 캡쳐)

어린 여학생을 동원했고, 경찰은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여성을 무차별 강제 연행하였다고 한다. 마을단위로 일정 수의 여성을 할당하여 강제 연행은 물론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세대를 중심으로 우선 징발했다고 한다. 이렇게 성노예로 차출된 꽃다운 10대 어린 여자아이들은 전국적으로 약 20여 만 명에 달했다.

이들 여성들은 피에 굶주린 일본군이 배치된 군부대에 강제로 끌려가 성적 착취를 당하는 치욕의 성노예 생활을 당해야 만 했다. 이러한 작태는 1992년 ‘정신대의 고용조건·동원권자· 의무규정 등을 명시한 일왕 칙령(勅令) 제519호〈여자정신근로령---1944년 8월 22일 공포〉’가 발견됨으로써 일왕이 직접 개입하였음이 밝혀졌다. 이는 그 동안 수많은 관련자들의 증언. 국제기구의 판결 등에도 불구하고 부인으로 일관하던 일본 정부에 변명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된 것이다.
(칙령이란? 일본에서 '살아있는 신(現人神)'인 일왕의 명령을 말하며 그것은 절대적인 명령이어서 심의 또는 논의 자체를 할 여지가 없었다. 일본은 아시아침략전쟁 패망 때까지 절대적 명령인 칙령을 발동시켰던 독재국가였다) 

'성노예'로 끌려간 여성들은 대부분이 한국, 중국,대만인들이다. 그 외 동남아시아 각국은 물론 네들란드 등 유럽 여성들도 일부 있었다. 피에 굶주린 일본인들 앞에 보이는 여성들은 나이와 국적에 불문하고 예외가 아니었다.

 

성노예 운영 실태

 죽음이 오히려 아름다운 성노예 생활

▲잠자리 만 있는 위안소 내부, 위안소 내부에 부착된 병참사령관의 주의사항 및 위안소 규정(나눔의 집 캡쳐)


성노예 제도는 일왕을 중심으로 일본 정부와 군대에 의해 입안. 설치되고, 관리•유지• 조장됐다. 성노예 장소는 고도로 통제되고 제도화된 시스템 아래에서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채 무장경비병의 순찰 감시를 받았다. 성노예 장소 소위 일본이 말하는 '위안소'는 일제가 저질렀던 전쟁터에는 어김없이 설치되었다. 일본 본토는 물론이고 중국. 동남아시아 등 각 지역이었다.

아시아침략전쟁 말기 1944에서 1945년 사이 오키나와에는 120여 곳의 위안소가 설치돼 적게는 500명에서 많게는 1000여 명의 성노예 여성들이 강제 동원되었다.그러나 얼마나 많은 위안소가 설치되었는지, 얼마나 많은 성노예 여성들이 동원되었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그것은 일제가 패망하자 대부분의 성노예들을 학살시켰고, 당시 모든 서류 파기 및 현재까지 그들의 치부를 숨기기 위하여 실태 파악에 전혀 협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5년 6월 17일 중앙일보가 보도한 상하이 사범대학 역사학과 쑤즈량(蘇智良.중국위안부연구센터 주임)학자의 13년간 성노예(위안부) 조사 실태를 살펴보면 단편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중국 상하이(上海)에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을 위한 위안소 149곳이 집중적으로 운영되어 위안소 수가 너무 많아 놀랐다" "일본 해군사령부가 있던 훙커우에만 70여 개의 위안소가 몰려 있었다" 또 36년부터 상하이 거주 조선 상인들이 운영하던 술집 등도 '일본군 위안소'로 대거 활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인들이 운영하던 '런던 주점'과 '아리랑 주점' 등이 위안소로 운영됐고 그냥 위안소로 불린 곳도 여러 곳 있었다"고 말했다. 또 조사 결과 위안부 여성들은 일련번호를 부여 받고 작은 쪽방에서 기거했으며 감금과 폭행에 시달리는 등 지옥 같은 생활을 했다”

성노예 여성들의 생활은 기본적으로 위안소 규칙이 있었다. 위안소 이용규칙에는 이용시간. 성병검사. 요금. 휴일 등에 관한 세부사항까지 규정되어 있으며, 특히 위생관련 규칙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터에 규칙이 없듯이 이러한 규칙은 한낮 허울에 불과했다. 성노예 여성들은 겨우 다다미용 침대 하나 놓여 있는 조그만 쪽방에서 아침부터 초저녁까지는 병(兵), 초저녁부터는 하사관, 야간에는 장교를 상대하는 초 강행군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특히 장교들은 새로 들어오는 깨끗한 성노예들을 독차지할 수 있었으며 숙박할 수 있는 특권까지 주었다고 한다.


                                                ▲차례를 기다리는 일본군


전쟁터에서 여러 부대가 같이 주둔할 경우에는 서로 요일을 달리해서 위안소를 이용하였고, 군인 한 명당 대개 30분이나 1시간 이내로 이용시간이 제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노예 여성 대부분은 하루에 수십 명의 군인을 상대하여 밑이 붇고 다리가 펴지지 않을 정도로 착취당했다고 한다. 주말이면 훨씬 더 많은 군인을 상대하여야 했다. 공휴일에는 군인들이 30~40명씩 팬티만 입고 밖에 줄을 서 있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팬티까지 벗고 다른 군인이 볼일을 보는 도중에 들어오기도 하는 자, 조금만 시간을 끌면 문 밖에서 재촉하는 괴성을 지르는 자 등 그야말로 정신병자들의 야비규환 그 자체였다고 한다. 참전 일본군 증언에 따르면 일부 여성들은 동굴에 임시로 만들어진 위안소에서 피에 굶 줄인 군인들에게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집단 강간을 당했다고 한다.

성노예 여성들은 밥과 된장국 약간의 반찬이 있는 식사를 하루에 두 세끼 제공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군인이 많이 들어오거나 부대로 파견된 경우에는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또 위안소가 없는 지역에 파견되면 임시 막사에서 그 부대의 전 인원을 상대하도록 하는 등 인권이란 생각할 수 없는 생지옥과 같은 생활의 연속이었다. 성노예 여성들은 군수품 취급하듯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일본군 무개트럭에 실려 전선으로 이동하는 성노예 여성들(나눔의 집 캡쳐)

매일 얻어맞는 폭행은 다반사였다. 달을 쳐다보면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때리고, 혼잣말을 하면 무슨 욕을 했느냐고 때리고, 막사 바깥으로 나오면 어딜 나오느냐고 발길로 차서 바깥 구경까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부대 안의 것은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라고 해서 손으로 눈을 비스듬히 가리고 다녔다고 한다. 술에 취한 군인들은 이유 없이 무자비하게 폭행을 하는 것은 기본이고 칼로 찌르기도 했다. 말을 듣지 않는다고 폭력을 행사하여 몇 일간씩 실신하는 사태도 수시로 발생하였다고 한다.


위안소 경비가 엄격하기도 하려니와 섬이나 허허벌판 타국에서 지리를 알 수 없어 탈출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어린 나이의 이들은 도망갈 엄두를 못한 채 자포자기하고 성 노예생활을 계속할 수 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생지옥과 같은 생활에 자살을 하기도 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탈출을 시도하거나 반항하는 성노예 여성들은 수일 간 굶주림과 족쇄가 채워진 상태로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의 욕구를 채워줘야 했다. 일본군이 동원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최후를 맞이하기도 했다고 한다.

 

 

 군인들은 성병 예방을 위하여 콘돔을 써야 했으나 콘돔을 쓰지 않은 군인들이 대다수였다. 성노예 여성들은 일주일에서 열흘에 한번씩 군의관이나 위생병에게 성병검사를 받아야 했다. 검사 결과 합격된 성노예 여성들만 군인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전쟁터의 극한 상황에서 위생문제가 지켜질 수 없었다.그 결과 많은 성노예 여성들은 성병에 걸렸다고 한다. 성병에 걸리면 606호로 불리는 주사를 맞거나 중독 위험이 큰 수은으로 반복적으로 치료를 받아 불임은 기본이고, 부작용으로 살이 썩어 들어가는 등 각가지 병을 얻었다고 한다.  오키나와에서는 성병에 걸린 성노예 여성들을 우유에 청산가리를 타서 먹인 뒤 동굴 속에 몰아 넣고 수류탄으로 집단 살해했다고 한다. 이들 여성에게 있어서는 죽음이 오히려 아름다웠던 것이다.

▲탈출하다 잡힌 성노예 여성(맨발과 버려진 군화를 신고있으며,쇠사슬에 묶어져 있다)

험난한 귀향 길

일제가 패망하자 성노예 여성들은 일제로부터 철저하게 버림을 받았다. 범죄자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착취할 대로 착취하고 이용할 대로 이용한 성노예 여성들을 아무런 연고도 없는 전쟁터에 남겨 두고 자신들만 도주했다. '성노예'에 대한 증거를 없애기 위하여 북버마 전선,오키나와, 남태평양의 트랙섬 등 전쟁터 각지에서는 퇴각하는 일본군들이 성노예 여성들을 집단 학살시켰다. 패전으로 자포자기한 군인들이 자살을 하면서 성노예 여성들에게도 자살을 강요했으며, 동굴이나 잠수함에 성노예 여자들을 집어넣고 몰살시키는 등 천인공노 할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관계 자료들을 모조리 폐기 처분하고 "민간 업자들이 여자들을 사온 것이지, 정부가 나서서 여자들을 동원한 바 없다"고 앵무새 지껄이듯 지금까지 주장하고 있다.

▲미군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버려진 성노예 여성들(나눔의 집 캡쳐)

다행히 살아남은 여성들은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귀국선을 타거나 혼자 스스로 숱한 어려움을 헤치면서 고향을 찾을 수 있었다. 살아 남아 증언한 대부분의 성노예 출신 여성들은 "어느 날 갑자기 군인들이 오지 않아서 어리둥절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전쟁이 끝난 것이었다"고 진술했다.

한 일본인 기자는 "귀국하려던 한 임신한 조선여자는 남아시아의 원주민 마을에 주저앉고 말았다"고 적고 있다. 만주에 있었던 한 성노예 출신 할머니는 "너무 추워 군인들이 버리고 간 군복과 내의, 양말과 운동화까지 주워서 몸에 걸치고 혼자 며칠을 달려서 마침내 조선인 귀국대열과 만날 수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대만의 위안소에 있던 한 성노예 여성은 "배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몸 버리고 무일푼으로 돌아가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너무 처량하여 돈이라도 벌어 가자고 생각하고 다시 내지로 돌아가 식당에서 일하다가 몇 년이 지난 뒤 귀국했다"고 한다.

몸이 아파 움직일 수 없는 성노예 여성과  ‘망가진 몸으로 고향에 돌아가도 모두 나를 업신여기겠지하는 자격지심으로 귀국을 포기한 여성들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지금도 캄보디아.필리핀.태국.중국 등 남태평양 오지에는 훈할머니. 곽영남. 박차순씨와 같은 성노예 출신 생존자가 아직도 적지 않게 있을 것으로 관계자들은 추정되고 있다. 

 

 

관계자 증언

◎ 리콴유(李光耀) 前 싱가포르 총리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그의 자서전에서 일제의 만행에 대한 증언과 함께 일제의 싱가포르 점령시절 성노예 문제를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나는 케언힐 로터리를 따라 울타리 밖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일본군을 봤다. 근처에 사는 사람의 애기를 들어보니, 그 안에는 한국인과 일본인 여자들이 사는데 이 여자들은 군부대를 따라 다니며 병사들에게 서비스를 해준다는 것이었다.병사 200여 명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느라 줄지어 늘어서 있는 모습이 신기하게 보였다. 나는 그날 여자들은 보지 못했지만 ‘위안소’라고 한문으로 적힌 표지판을 봤다. 그런 위안소가 중국에 있다는 애기는 들어봤지만 이젠 싱가포르에까지 들어온 것이다’

◎ 구보타 데쓰지(久保田哲二) 前일본군 상사

난징대학살을 자행하고 조선인 여성을 군위안부로 동원한 일본군의 만행을 진심으로 사죄하는 마음에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일제의 아시아침략 전쟁 당시 일본 히로시마 보병 11연대 소속으로 1939년부터 45년까지 중국 등지에서 복무한 前 일본군 상사 구보타 데쓰지(久保田哲二·82). 그는 2001년 11월 대구 곽병원 대강당에서 ‘대구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주최로 열린 ‘남경대학살 참전 일본병사 강연회’에 참석해 당시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했다. 구보타씨는 최근 한일 양국간의 현안으로 부상한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를 보고 내가 목격한 ‘역사적 사실’을 적극적으로 증언해야겠다는 생각

이 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성노예 문제와 관련해 “당시 (일본군)부대 내의 위안소는 오전 9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 10시간 이상 조직적으로 관리 운영됐다”고 회상했다. 그는 “위안소에서 10대로 보이는 조선인 처녀가 ‘어머니! 어머니!’를 외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군대가 직접 위안소를 관리해 우리는 군표를 들고 아무런 죄의식 없이 그곳을 들락거렸고….” “그 뿐만이 아닙니다. 노인 둘과 함께 피난 가는 민간인 여덟 명을 죽였고, 지나가는 여성을 강간한 뒤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살육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이 차마 할 수 없는 숱한 만행을 저질렀어요. 군국주의가 심어준 ‘조선인과 중국인은 인간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우월감 때문이었습니다. 나도 위안소에 두세 번 가본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정신대 피해자중 이용수 할머니가 “왜 뒤늦게 이제야 증언하느냐?”고 구보타씨를 꾸짖었다. 그는 “정말 죄송하다. 한동안은 경찰의 감시로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며 용서를 빌면서 그는 최근까지도 일본 국가가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있었음을 암시하였다. 구보타씨는 “한일 양국이 선린 우호의 동반자로 지내기 위해서는 일본정부가 먼저 과거사를 솔직히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 이케다 마사에(池田正枝)
일제하의 서울 모 국민학교 교사로서 어린 제자들을 성노예로 보낸 이케다 마사에(池田正枝)씨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 나머지 당시의 학적부를 찾아내어 공개 했다. 기록부에는 어린 학생들을 성노예(위안부)로 동원하는 경위와 설득 과정 등이 소상히 적혀 있는데, 그들의 비인도적인 행위는 새삼 우리를 전율케 했다.

◎ 박 영심
북한에 거주하고 있는 박 할머니는 2005년 4월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에 밝힌 체험담에서 "일본놈들이 어느 날 '너희들이 식사도 변변히 못하고 있으니 오늘은 고깃국을 대접하겠다'면서 고깃국을 주었다"면서 "영문도 모르고 다 먹었더니 놈들은 '그 고깃국이 조선처녀의 고기로 만든 국이라며 껄껄 웃어댔다"고 증언했다. 박할머니는 "일본놈들은 저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던 처녀를 죽여 가마솥에 넣어 끓였다"며 "일본놈들은 정말로 짐승 같은 놈. 사람가죽을 쓴 야수.식인종 무리였다"라며 피눈물로 증언했다.

박 할머니는 1938년 3월경 17살 때 일본순사가 나타나 "좋은 일자리가 있으니 소개해 주겠다"고 해 "부모님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저항했으나 다짜고짜 기차에 실어 어딘가로 데려 갔다. 그 곳은 중국 난징에 있는 '금수로 위안소'였다고 한다. 박할머니는 일본놈들의 요구에 반항하자 마구 때리고 차면서 마지막에는 긴 칼을 봅아 목에 들이대고 "이래도 응하지 못하는가"라고 위협했다고 말했다. 그 날부터 하루에 일본군인 30여 명을 대상으로 '성봉사'를 해야만 했다며 치를 떨었다.

◎ 정 옥순 .김 대일
북한에 거주하고 있는 정 옥순, 김 대일 할머니는 2005년 8월 11일 노동신문에 다음과 같이 피눈물로 증언하면서 치를 떨었다.
"하루는 일본군 장교 8명이 벌거벗고 나타나 나에게 동시에 달려들었다. 놈들은 나에게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갖은 짓을 다 했다, 나는 더는 참을 수 없어 이빨로 놈들을 물어뜯었다. 그러자 일본군들은 물고문을 시킨 뒤 나체로 철봉에 거꾸로 매달리게 하는 등 가혹한 응징을 가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군인들이 입 안에 쇠몽둥이를 넣고 휘둘러 이빨이 모두 부러졌고 입술을 뒤집어 바늘 도장으로 입묵(문신)을 하기 시작해 온몸에 흉한 그림을 그렸다.”

"평양이 고향인 여자가 임신을 했는데 하루는 다나카라는 자가 술을 잔뜩 마시고 들어와 다짜고짜로 그녀를 쓰러뜨렸다. 놈은 사정없이 그녀의 배를 걷어찬 다음 군도로 배를 쭉 갈라 태아를 꺼내 내동댕이쳤다. 다나카는 이어 다른 위안부를 모아 놓고는 여자의 내장을 칼 끝으로 끄집어 낸 뒤 목에 걸고 방바닥에 낭자한 피를 핥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이때 많은 여자들이 기절했고 심장이 파열돼 죽은 여자들도 있었다"

◎ 훈 할머니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을 반 세기 만에 밟으니 목이 메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가족들을 꼭 찾아주십시오. 나를 그렇게 나쁘게 한 일본 군인들을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제 자신도 궁금합니다. 왜 끌려가게 되었는지” 이 말은 17세 때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갔다가 97년 반백 년 만에 고국을 찾아 피를 토하듯 내 뱉은 캄보디아 거주 성노예 출신 훈 할머니의 말이다. 훈 할머니는 일본 패전 후 의지할 곳 없는 이역에서 10여 년을 온갖 천대를 받다가 오직 살기 위하여 캄보디아인과 결혼하여 살아왔었다. 그녀는 2001년 2월 76세의 일기로 이국 땅 캄보디아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 박 옥 선
2001년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가 귀환하지 못한 채 중국 땅에서 60여 년 간 살아온 '제2의 훈 할머니' 박옥선(78세).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무린의 한 오지 마을에 살고 있는 박 할머니는 18세 때 1941년 고향인 경남 밀양에서 헤이룽장성의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가 약4년 동안 일본군을 상대하는 지옥 같은 생활을 했다는 것. 박 할머니는 '방직공장인 줄 알고 따라 나섰다가 휴일이면 문 앞에 줄을 서서 재촉하는 병사들을 상대하다 죽을 생각도 여러 번 했지만 차마 죽지 못하고 살아 남았다'고 증언했다.

◎ 곽 영 남씨, 박 차 순씨
한국정신대연구소는 2003년 제보를 받고 중국을 방문해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 가 60년 넘게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곽영남(78)씨와 박차순(80)씨를 찾아냈다. 이 중 곽씨는 고향 방문을 희망하는 반면, 박씨는 고향 주소를 기억하지 못해 귀환을 망설이고 있다고 밝혔다. 연구소에 따르면, 곽씨는 20세이던 지난 1944년 중국 신양에서 1년 동안 일본군 성노예로 생활했으며, 광복 이후 돌아오는 방법을 몰라 중국에 남게 됐다고 한다.
또 다른 할머니 박씨도 20세이던 지난 1942년 일본군에 의해 중국 우창(武昌) 등에 끌려가 4년 정도 성노예 생활을 했다. 박씨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위안소에서 도망쳐 나왔지만, 수치심 때문에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인 남성과 결혼했다고 한다.

◎ 노동신문 
2005년 8월 11일 북한 노동신문은 일제의 성노예(위안부)에 대한 만행을 다음과 같이 고발했다. "일제는 단순히 일본군 위안부들을 동물적인 성욕을 충족시키는 도구로써 뿐 만 아니라 비인간적인 인체실험 대상으로 삼았으며 나중에는 그들의 육체를 식료품으로, 전략물자로까지 대치하는 전대미문의 살인만행도 거리낌없이 감행했다"

이 신문 일제시대 요코스카(橫須賀) 해군병원에서 일했다는 한 노인의 증언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병원에서 매독에 걸린 위안부들을 대상으로 한 인체실험이 자주 진행됐다. 살인귀들은 인체실험이 끝나면 더는 쓸모가 없게 된 위안부의 명줄을 끊고 내장은 내장대로 드럼통에 담고 몸체는 토막을 내 밀차(손수레)에 실어 적재장으로 날랐다.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가 그것을 싣고 어디론가 갔다가 다음날이면 기름이 든 드럼통을 실어 오곤 했다. 그것은 사람의 기름이었다, 놈들은 그것을 항공유에 섞어 전쟁에 이용했다"

그리고 이 신문은 "일제 침략군 야수들은 조선인 위안부를 총창으로 찔러 죽이고 일본도로 토막 내 나눠먹는 상상 밖의 몸서리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것은 인간의 정상적인 두뇌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만고의 죄악이었다. 일제의 죄악의 역사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덮어버릴 수 없으며 일본은 그에 대한 책임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끝을 맺었다.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 기 타 생 존 자 증 언
전쟁터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성노예 출신의 할머니들은 이렇게 증언했다.
◇ "우리 마을에서 일본인 앞잡이 노릇을 하던 50대의 아저씨가 나에게 공부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으로 보내 주겠다고 해서 따라 나섰다."
◇ "반장 부인이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한 집에서 적어도 딸 한 명씩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내가 식모로 있던 집의 딸을 대신해서 어떤 일본인을 따라 나섰다."
◇ "집안이 가난해 너무 배가 고팠다. 어느 날 일본 공장에 취직 시켜 준다며 여자를 모집한다기에 나는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이 모집에 응했다."
◇ "친구 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파출소 앞을 지나다가 순경에게 붙들려 그 길로 위안소에 강제로 끌려갔다."
◇ "학교 담임 선생이 정신대에 나가라고 했다. 선생의 말이라면 반드시 복종하던 때였으므로 나는 선생이 시키는 대로 일본 도오야마현에 있는 공장으로 갔다. 그러나 공장 견학만 시킨 뒤 곧바로 남양군도의 위안소로 끌려갔다."

◎ 성노예 할머니 지원운동 펴는 미츠코(信川光子)

"한국의 위안부(성노예) 출신 할머니들이 저의 어머니들입니다. 그분들은 저에게 가족입니다." 일본에서 위안부 할머니 돕기 운동을 벌여 온 평범한 가정 주부인 일본인 노부카와 미츠코(信川光子.일본 사이타마현 소오카 거주). 노부카와는 95년 뜻을 같이 하는 친구 30여 명과 함께 '할머니들과 함께 걷는 모임-조각보'를 결성했다. 98년 모임이 해체될 때까지 도쿄(東京) 등 일본의 대도시에 있는 학교.직장에서 30여 차례에 걸쳐 할머니들의 증언을 듣는 집회를 열었다. 중.고등학생들이 증언을 듣고 할머니들과 서로 붙잡고 울곤 했어요. 학교에서 전혀 배우지 못한 역사이므로 충격이 컸던 것이죠. 학생들이 일본 정부가 정식으로 할머니들께 사과하고 배상해야 

한다고 말하는 모습을 볼 때 보람을 느꼈어요. 노부카와는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다가오는데도 아직까지 할머니들의 한(恨)이 치유되지 않은 것이 가슴 아프다"며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실 때까지 성노예(위안부) 할머니 돕기 운동을 펼치겠다"고 말했다.

◎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吉見義明는 그의 저서 ‘종군위안부’에서 '종군위안부란 일본군 관리 하에 놓여져 무권리 상태인 채로 일정기간 구속되어 장병에게 성적 봉사를 강요 당하는 여성’으로 정의하고 있다. 요시미 요시아키은 일본군에 의한 성노예를 둘러싼 문제에 대해
1. 군대가 여성을 계속적으로 구속하고 군인이 의식하지 않고 윤간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폭력의 조직화이고 여성에 대한 중대한 인권 침해이고
2. 인권차별.민족차별이며
3. 경제적 계층차별이자
4. 국제법 위반행위요, 전쟁 범죄라고 지적했다
또한 종군위안부 문제는 이것이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고, 국가가 추진한 정책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크기 때문에 이 문제를 ‘복합적인 인권침해 사건’으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노예에 대한 세계의 시각

도쿄 국제 여성 전범법정
여성을 전시 성노예(위안부)로 강제 동원한 일본의 전쟁 범죄 행위를 단죄하기 위해 2000년12월 도쿄에서 열린 ‘국제 여성 전범법정’은 히로히토(裕仁) 일왕과 일본 정부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렸다.

가브리엘 맥도널드 구(舊)유고 국제전범 법정 전(前) 소장 등 4명으로 구성된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로 기소된 히로히토 일왕과 옛 일본군간부 등은 인간의 노예화. 고문. 살인. 인종적 이유 등에 의한 박해 등을 금지하고 있는 ‘인도에 대한 죄’를 위반했다고 유죄 판결을 내렸다. 아시아에서 자행된 여성에 대한 전시 성폭력을 둘러싸고 국제 관습법으로 정착돼온 인도에 대한 죄가 적용된 것은 처음이다. 재판부는 특히 히로히토 일왕에 대해 “실질적인 일본군 최고 통수권자로서 위안소 설치 등 일본군의 잔학 행위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묵인한 기소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이로써 일제가 아시아침략 전쟁 패망 후 일본군의 전쟁 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설치된 극동 국제군사재판에서 사실상 미국측의 주도하에 기소를 모면했던 히로히토 일왕은 전후 반세기 만에 국제 사회에서 전쟁 범죄자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 재판부는 이와 함께 일본의 국가 책임에 대해서도 “일본군이 여성을 전시 성노예로 동원, 마치 군수물자처럼 취급하면서 고문과 강간을 자행하고 성 서비스를 강요한 행위는 당시 일본이 가입, 비준했던 인신매매 금지 조약, 강제 노동 금지 조약 등의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유죄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특히 “일본 정부는 전후 위안부 관련 문서를 소각하는 등 만행 사실을 은폐로 일관하면서 국제법의 정의에 비추어 마땅히 져야 할 법적 책임을 회피해 왔다”며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개인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일본군 성노예 등 여성에 대한 전쟁 범죄 행위를 단죄하는 첫 국제 민간 법정으로 주목을 끌었던 도쿄 여성 법정에는 히로히토 일왕 등 모두 25명이 전범으로 기소됐었다.



국제여성법정
일본군 성노예 문제 책임자를 처벌하기 위해 2001년 12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국제여성법정’이 일본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을 요구했다.
특히 국제여성법정은 2차대전 중 일본과 싸웠던 연합국 측에 대해 성노예에 관한 기록 공개를 요구하는 한편, 히로히토(裕仁) 前 일왕을 기소하지 않은 배경을 담은 문서를 공개하라고 촉구했다. 이 법정은 가브리엘 커크 맥도널드 전 舊유고 전범법정 수석판사가 재판장을 맡았다. 맥도널드 판사는 총 240쪽 분량의 판결문에서 “성노예(위안부) 제도는 일본 정부와 군대에 의해 입안, 설치되고 관리·유지·조장됐다”면서“고도로 통제되고 제도화된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위안소가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채 무장경비병의 순찰 보호를 받았으며 일부 여성은 동굴에 임시로 만들어진 위안소에서 군표를 사서 차례를 기다린 군인들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밝혔다. 판결문은 이어 “성노예(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은 지난 56년간 관련자를 처벌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충분하게 사과하지 않으면서 배상도 하지 않은 일본 정부에 있다”고 판시했다.

유엔인권기구
유엔인권위원회의 한 보고서는 무력 분쟁 중 성노예를 전쟁범죄로 규정하고 일제의 아시아침략 전쟁 중 비인간적인 군대 성노예 운영과 관련하여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 배상. 전쟁범죄 책임자 처벌 등을 권고하였으나, 일본 정부는 군대 성노예와 인신매매 등 여성폭력에 관한 국제사회의 권고 이행을 지속적으로 거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라디카 쿠마라스와미(Ms.Radhika Coomaraswamy) 유엔특별보고관은 2003년 제네바에서 개최된 제59차 유엔인권위에 제출한 여성폭력에 관한 최종보고서에서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군 성노예로 억류됐던 ‘위안부’에 대한 법적 책임을 아직도 수용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고 “그러한 범죄에 책임이 있는 가해자들의 대다수도 처벌하지 않고 있다”며 일본의 법적 책임 인정과 정부의 배상 책임 및 책임자 처벌을 촉구한 지난96년과 98년의 유엔인권위 결의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보고서는 이와 함께 일본은 인신매매를 당한 희생자들의 처우에 관해 국제사회가 내린 많은 권고들을 채택하지 않고 있다면서 일본 정부는 인신 매매된 여성들을 불법 이주자들로 간주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쿠마라스와미 특별보고관은 무력분쟁 중 성폭력에 관한 문제와 관련해 “세계의 대부분 국가들이 서명한 제4차 제네바 협약은 비록 ‘중대한 위반’이라고 명시적으로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전시에 자행된 강간을 금지행위로 간주했다”고 전제했다. 그러나 많은 국가들은 전쟁 중 강간은 전쟁범죄 또는 반(反)인도적 범죄라는 주장을 폈으며 이러한 반론은 특히 ‘위안부’ 여성과 성노예 문제가 자신들에게 제기됐을 때 일본 정부 관리들에 의해 강력하게 개진됐다고 비판했다.

쿠마라스와미 특별보고관은 “이러한 간격을 메우는 것이야 말로 국내와 국제수준에서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는 모든 단체와 개인이 자신들의 활동을 집중해야 할 중요한 영역 중의 하나”라고 성폭력 범죄자에 대한 ‘불처벌’ 관행의 종식을 선결 과제로 제시했다.
쿠마라스와미 특별보고관은 지난 57차 유엔인권위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과거에 강간과 여성에 대한 폭력을 자행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유엔회원국들이 조사와 기소, 처벌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일본 군대위안부 책임자를 처벌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 여성 폭력자들에 대한 불(不)처벌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기여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강조하고 있다.

쿠마라스와미 특별보고관은 제58차 유엔인권위원회 참석 후 기자간담회에서 “일제하 군대위안부는 보스니아 사태를 계기로 국제적인 조명을 받고 있는 전쟁과 무력분쟁시 여성에 대한 강간 등 조직적 성폭력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사례라는 점에서 (최근의 성폭력 사례와도)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쿠마라스와미 특별보고관은 "일본이 민간단체를 통해 설립한 ‘아시아여성기금’은 군대위안부 희생자에 대한 법적 책임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舊 유고전범법정(ICTY)이 최근 판결을 통해 강간과 성노예가 반(反)인도적 범죄라는 점을 인정하였다.

2005년 4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속개된 제61차 유엔인권위원회에서도 성노예 문제에 성의를 보이지 않는 일본은 각국으로부터 집중 난타를 당했다.

특히 북한 대표부는 "일본은 전시 강간은 전쟁범죄나 반인륜 범죄가 아니라고 생억지를 쓰면서 절대 다수 피해자들이 반대하는 '민간기금'을 통한 위문금 지불로 국가적 책임을 회피해보려 하였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한편 한국.미국.일본.영국,네들란드.캐나다.뉴질랜드.중국.대만.필리핀.북한을 포함한 11개국 87개 NGO는 루이즈 아버 유엔인권고등판무관에게 반성하지 못하는 일본의 안보리 진출에 반대한다는 공동성명를 전달했다고 한다.

▲필리핀 성노예(위안부) 여성들의 항의 집회(연합뉴스)


UNHCHR
2002년 8월 메리 로빈슨 유엔인권고등판무관(UNHCHR)은 ‘위안소’ 등을 비롯해 무력 분쟁 중에 자행된 어떤 형태의 성 노예도 국제인권 및 인도법에 대한 중대한 위반행위로 간주된다면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보호 및 처벌 대책이 요구된다고 밝혔다.

로빈슨 인권고등판무관은 제54차 유엔인권소위원회에 제출한 ‘무력 분쟁 중 조직적 강간, 성노예와 유사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통해 “영토점령을 비롯한 무력분쟁은 성폭력을 증대시키는 경향이 있다”면서 이같이 촉구했다. 보고서는 특히 무력분쟁 기간에 자행된 성폭력과 성노예 행위에 대한 불처벌 관행을 종식하기 위해서는 국제사회, 정부, 그리고 민간단체들의 정치적 의지와 단합된 행동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성폭력과 성노예 행위를 저지른 범법자들에 대해서는 국제.인도법이 적용될 수 있지만 예방. 조사. 처벌. 보상 및 재활 등을 비롯한 모든 법적, 초법적 대응에 있어 이러한 범죄들이 각별히 성 차별과 연관될 수 밖에 없는 속성과 파장이 고려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로빈슨 인권고등판무관은 舊유고전범법정(ICTY)이 최근 판결을 통해 강간과 성노예가 반 인도적 범죄라는 점을 인정한 것은 여성 인권보호에 획기적인 진전이라고 평가하고, 특히 2002년 7월 발효된 국제형사법원에 관한 로마조약에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의 권고를 반영해 강간, 성폭력, 그리고 성차별과 관련된 범죄들에 관한 특별조항이 삽입된 것은 중대한 진전이며 국제형사법원의 향후 판정은 국제법의 관점에서 성차별에 관한 폭력에 대한 법체계를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 보고서에 일제하 군대위안부를 뜻하는 ‘위안소(comfort stations)’라는 용어와 무력분쟁의 대상에 ‘영토점령’이란 표현이 명기된 것은 일본 정부에 대한 법적책임 인정과 배상을 권고한 라디카 쿠마라스와미 유엔특별보고관의 입장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의 인신매매담당 자문관 앤 갤러거 여사
앤 갤러거 자문관은 일본에 의해 설립된 ‘아시아여성기금’의 성격에 관하여 "아시아여성기금은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책임인정 및 배상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별개의 것"이다. 일본의 조치는 서방언론에 의한 이해가 부족한 형편이며, 여성인권 차원에서 인신매매와 폭력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일본의 군대위안부 문제를 언급하겠다"라고 피력했다.

국제노동기구(ILO)
ILO는 일본정부가 ‘아시아여성기금’과는 별도로 조속한 시일 내에 군대위안부 희생자에 대한 보상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ILO는 2001년 작성한 보고서를 통해 “(군대위안부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청구인들 대다수가 ‘아시아여성기금’에 의한 보상을 수용할 수 없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일본정부가 청구인들과 그들을 대표하는 단체들과 협의를 해서 더 늦기 전에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희생자들에게 보상할 수 있는 대안을 강구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ILO이사회 산하 ‘협약 및 권고 적용에 관한 전문가위원회’가 작성한 이 보고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일제 하 강제징용 문제에 관해서도 “일본정부가 희생자와 서로 만족할 수 있는 방식으로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처해 나갈 수 있기를 거듭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이 보고서는 2000년 11월 23일부터 12월 8일까지 비공개로 열린 일본의 ILO협약29호(강제노동금지) 위반과 관련해 제출된 진정서에 대한 전문가위원회의 협의결과를 총회보고를 위해 정리한 것이다. 일본은 지난 1932년 ILO의 강제노동금지 협약을 비준했다.

위원회는 보고서에서 이른바 군대 ‘위안소’에 수용된 여성들의 심각한 인권침해와 성적 학대를 앞서 지적한바 있으며, 이는 강제노동금지 협약의 요건과 위배된 것으로 적절한 보상의 근원이 된다는 입장을 확인했다. 특히 (희생자 피해에 대한) 구제는 오직 ILO협약의 책임 있는 당사자인 일본정부에 의해서만 제공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시했다. 위원회는 일본정부가 국제법상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으며 희생자에 대해서는 법적 배상을 비롯한 완전한 보상과 함께 책임자의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한 유엔인권소위 특별보고관 게이 맥두걸의 보고서와 반인륜적 범죄로 피해를 당한 희생자에 대한 배상을 요구한 유엔인권소위 결의안이 채택된 사실도 상기시켰다. ILO는 앞서 지난 98년 일본 군대위안부가 ILO의 강제노동 금지 협약에 위배된다는 결론을 내린바 있다.

일본 오사카(大阪) 특수영어교사노조는 지난 95년 6월 일본 군대위안부가 ILO협약에 위배된다는 진정을 ILO에 제기했으며, 이어 98년 한국노총과 민주노총도 같은 내용의 진정서를 제출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의 포로심문 기록

아시아침략전쟁 당시 일본군뿐 아니라 일본 기업들도 한국인 여성들을 이용해 ‘기업 위안소’를 운영했음을 보여주는 문헌기록과 사진 등이 2003년 1월 국내외 학자들에 의해 조선일보(2003.1.4)에 공개했다.
서울대 사회학과 정진성(鄭鎭星) 교수와 미국 UCR 장태한 교수는 지난 6개월 동안 한·미·일 10여 명의 학자들이 공동 발굴한 성노예 관련 자료들을 공개하고, “일본의 미쓰이(三井), 미쓰비시(三菱) 같은 기업들이 일본 정부의 장려· 묵인에 따라 노무자 대상의 기업 위안소를 일본 본토에서 운영했다”고 밝혔다. 정 교수 등에 따르면 기업 성노예의 규모는 노동자 1000명 당 40~50명으로 총 1만5000~2만여 명에 달했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그 근거로 일본 육군성과 대동아성 기획원의 공문서, 기업 위안소에서 돈 대신 사용한 ‘금권’, 현재 후쿠오카(福岡)에 남아있는 기업 위안소 건물 사진 등을 제시했다.

▲필리핀 루손섬에서 미군 포로로 잡힌 한국인 성노예 여성에 대한 미군의 신상기록카드

육군성 정비국 전비과는 1940년 홋카이도(北海道)의 한 탄광회사에 보낸 공문에서 “탄광 내 노무자 생산성 향상과 성적욕구 해소를 위해 조선·중국 여성 창부를 유치할 것”을 지시했으며, 1942년 대동아성 기획원 문서에도 ‘노무자를 위해 위안소를 설치하라’는 내용이 나와있다고 정 교수는 밝혔다. 일본 정부는 기업들에 세탁부(洗濯婦) 등의 명의를 이용해 합법을 가장할 것도 지시했다. 기업 위안소의 존재는 지난 92년 일본 시민단체가 제기했지만 군 위안소 문제에 묻혀 관심을 끌지 못했다.

한편 장태한 교수는 2002년 7월부터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미국 정부의 비밀문서였다가 2002년 비밀 해제된 문건에서 발굴한 ‘미 정보부대(OSS)의 1945년 중국 쿤밍(昆明) 포로수용소 심문보고서’ 등을 제시하며 “위안부가 ‘강제와 사기’에 의해 끌려왔다는 것이 공식 기록으로 처음 확인됐다”고 밝혔다.
학자들에 따르면 NARA에서 발견된 기록은 1945년 전후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붙잡혀온 수백 명의 아시아 출신 위안부들을 미군이 개별 인터뷰한 기록으로 한국 여성 23명 등 107명의 진술을 종합한 이 보고서에는
“23명의 한국여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기업이 위안소로 운영했던 것으로 확인된 일본 후쿠오카(福岡) 지역의 2층 목조 건물
성은 강압과 사기에 의해 위안부(comfort girls)가 됐으며, 이 중 15명은 ‘싱가포르의 일본 공장에서 일한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 지원했다”고 적혀 있다. 미군이 작성한 이들의 프로필에는 사진과 지문·고향 등이 적혀 있었고, 직업란에는 ‘웨이트리스’나 ‘엔터테이너’ 등으로 기재돼 있었다.

장 교수는 NARA에서 발견한 중국 서적 ‘버마 전선 종군기’에 있는 일본군 연대장 타카미의 수첩 내용을 제시하며, 영국·프랑스 여성도 일본군의 성(性) 노리개가 됐다고 밝혔다. 이들은 인터뷰에서 “일본 기업인 A,B사의 배를 타고 강제로 전쟁터로 갔다”, “일본군은 패색이 짙어지자 ‘위안부로 일한 사실을 입밖에 내지 말라’고 명령했다”는 등의 진술을 했다고 관련 학자들은 전했다.


한.미.중.일 4개국 일본의 반인도적 범죄에 관한 국제회의
한.미.중.일 4개국 학자와 연구원 30여 명은 2001년11월 로스앤젤레스에서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UC)가 주최하고 UCLA 한국학연구소 등이 공동 후원한 ‘일본의 반인도적 범죄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주제발표와 토론을 통해 위안부.강제징용 등 일본의 전쟁범죄를 집중 조명했다.
미국에서 진행중인 한인 위안부. 징용소송 원고측 변호인인 배리 피셔 변호사는“미국은 나치 독일 강제노역 피해배상소송에서 유럽의 희생자들을 도와 결국 독일기업으로부터 수십억 달러의 합의금을 받아내도록 했으나 아시아 피해자들에 대해선 일본편을 들어 이들의 정의추구 노력을 실질적으로 방해하고 있다”며 “법정투쟁을 통해 제한적 범위에서라도 진실을 규명하고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야시 히로후미 일본 간토(關東)-가쿠인대 교수는 “일본의 군위안부 제도 도입과 발전은 당시 일본의 모든 군(軍)조직과 행정조직의 총체적 개입에 의해 이뤄졌다” “일본 기업도 공범자였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수지량 중국 상하이(上海)사범대 교수는 “위안부제도는 군사적 성노예 제도로 일본 군국주의 전쟁범죄의 중요한 부분이며 여성인권을 짓밟은 가장 폭력적 성범죄”라고 비난했다.
강정숙 한국정신대연구원 연구원은 “사쿠(콘돔) 제조업체인 오카모토주식회사는 민수가 거의 중단된 상황에서 생산품 거의 모두가 군위안소에서 비인도적 목적으로 쓰이는 군수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자기이윤 증식을 위해 사쿠를 생산했다”고 밝혔다.
김민영 군산국립대 교수는 “일본의 국유철도, 연락선, 상선, 여행사는 모두 징용 노무자 및 위안부들의 동원 및 연행을 알고도 의도적으로 돕고 이익을 누렸다”면서 “당시 일본이 통제경제 또는 동원체제가 일반적이었다 하더라도 해당 기업들이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던 만큼 결코 전쟁관련 책임이 무효화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김창록 부산대 교수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및 그 부속문서의 조문을 살펴볼 때 한국인 개인의 권리까지 포기했는지 명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본 법률 144호(한일협정에 근거, 한국인의 대일청구권을 일방 제한) 역시 일본국 헌법을 위반한 소지가 있는 만큼 개인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최봉태 변호사는 “현재 일본에서 벌어지는 재판의 결과만을 놓고 보면 정의롭지 못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으며 이는 일본 사법부가 가지는 한계”라며 “인류 역사상 위안부와 강제징용과 같은 반인도적 범죄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재판에서 법적 정의가 세워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 본 유 죄
김창록 부산대 법대교수는 부산일보에 다음과 같이 기고했다.
지난 2001년 12월4일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특이한 판결이 내려졌다. '국가가 인가한 강간인 일본군 위안부제도에 대해 일본은 책임이 있으며, 일왕 히로히토를 비롯한 10명의 일본인은 유죄다’라는 '일본군 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의 판결이 그것이다. 이 판결은 우선 죽은 자들에게 유죄를 선고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또한 판결의 주체가 국가의 법정이 아니라 피해국과 가해국 시민들이 구성한 '시민의 법정'이며, 그래서 판결을 집행할 강제력이 없다는 점에서도 특이하다.

이러한 판결의 특이성은 동시에 판결의 의의를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판결은, 인도에 반하는 범죄를 저지른 자는 죽어서도 법의 심판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라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또한 판결은, 법의 선언과 집행을 독점하고 있는 국가가 그러한 중대한 범죄를 방치할 때는 시민들이 나서서 법과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라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그 점에서 판결은, '약자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국가 중심의 20세기적 틀을 뛰어넘고자 하는 새로운 세기의 시도라고 보아 마땅할 것이다.
지금까지 '직무유기'로 일관해 온 국가들이 판결을 경청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 국가들에는,피해자들의 아픔을 방치해 온 한국 등 '피해국'들과, 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범죄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책임을 추궁하지 않은 미국 등 연합국 국가들도 포함된다. 하지만, 판결에서 '유죄'가 선언된 일본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겸허하게 판결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일본은 판결이 명하는 대로 진상규명 배상 명예회복 역사교육에 당장 나서야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일본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다. 역사교과서 파동은 그 하나의 증거다. 게다가 9·11 이후에는 미국의 '전쟁'에 편승하여 자위대를 파병하고, 그 여세를 몰아 일체의 전쟁과 전력을 금지하는 헌법 9조의 개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런데 언뜻 생각하면, 70만 대군을 자랑하며 해외파병을 당연하게 여기는 나라, 끊임없는 전쟁의 위협에 시달리는 한편에서 '전쟁하자'는 해괴한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나라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자위대의 파병이나 9조의 개정이 왜 문제인지 갸우뚱거려질 법도 하다. '전력을 가질 수 없으니 적이 침공해 오면 돌을 던지며 맞서야 한다'라는 일본 헌법학자들의 주장은 황당하게 느껴지기까지 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나름의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9조는 상징 일왕제와 함께 점령군사령관 맥아더가 패전국 일본에게 지시한 것이다. 점령의 편의를 위해 일왕제를 유지하기로 한 미국이, 침략의 원흉이라는 피해국들의 규탄으로부터 일왕제를 보호하기 위해 전쟁금지라는 '피뢰침'을 고안해냈던 것이다.
그런데 냉전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미국은 곧 얼굴을 바꿔 자위대의 창설을 명령했고, 그 후 줄곧 9조의 개정을 종용하고 있다. 하지만, 9조는 55년 동안이나 개정되지 못했다. 그것은 9조를 개정하는 것은 곧 군국주의를 부활시키는 것이다라는 피해국들의 비난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침략에 대해 책임은 지지 못하지만 9조가 있으니 걱정 말라'라는 것이 일본의 논리이고 보면, 일왕제에 의해 상징되는 침략에 대해 책임지지 않고서 9조를 제거하게 되면 침략의 위협은 고스란히 되살아 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일본의 한 우파 정치인은 9조를 개정해서 일본을 '보통국가'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자위전쟁도 군대도 부정하는 비정상적인 상태를 정상으로 되돌리자는 것이다. 그런데 '비정상'은 그것만이 아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책임을 지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것도 비정상이다. 게다가 역사를 되짚어 보면 이것이야말로 '일본의 비정상'의 핵심이다.
그 점에서 '일본 유죄'를 선언한 판결은, 반세기 이상 방치되어 온 피해자들의 아픔에 대한 만시지탄의 응답일 뿐만 아니라, 21세기의 일본이 '정상국가'가 되기 위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이기도 한 것이다.

 

 

일본의 태도

◆ 일본정부의 최초 사업은 매춘

일본정부는 아시아침략전쟁 패전 후 최초로 벌인 사업이 매춘사업이었다. 일본정부 수뇌부들은 아시아침략 전쟁 당시 성노예(위안부) 제도에 대하여 전문가였다. 그래서 이들은 미군이 일본열도에 진주하게 되면 이번에는 일본이 당할 차례라고 직감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18일 내무성은 화류업계의 대표들을 모아 진주군을 위한 시설에 대해 협의하고 진주군 특수위안시설에 대해서라는 무전을 경보국장 이름으로 각 부현에 발송하였다. 8월 28일에는 RAA(Recreation Amusement Association) 즉 특수위안시설협회가 결성되었다. 이어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아 대대적으로 위안부를 모집했다. 전후 처리의 국가적 긴급시설, 신일본여성을 구한다라는 선전문구를 동원하였다. 피폐해진 사회를 반영하듯 철모르는 다수의 여성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긴자(銀座). 다치카와(立川), 오모리(大森) 등에 세워진 시설에 보내졌다.

 

이에 대해 당시 내무성은 "평화적인 진주이고 군율이 엄정하다고 애기되는 미군병사들이다. 설마 무모한 폭행사건 같은 것은 생기지 않겠지만, 진주가 길어지면 미군병사의 섹스문제를 고려해주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금욕으로 인한 폭거를 억제하는 것도 되며 일본 부녀자의 위험을 방지하는 것도 된다"라고 말했다. 철학과 도덕성이 없는 일본이 자기 백성들을 상대로 이렇게 몹쓸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아시아침략전쟁 당시의 일제가 저질렀던 성노예는 상상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위안부(성노예)는 ‘화장실 역사’다
가쿠슈인(學習院)의 사카모토 다카오(坂本多加雄) 교수라는 자는 성노예에 대하여 ‘화장실 역사’ “위안부(성노예) 역사를 기술하는 것은 화장실 구조에 관한 역사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인 만큼 교과서에 쓸 가치가 없다”라고 지꺼렸다. 이는 전쟁에 미친 일본군들이 위안소를 ‘공중변소’라고 불렀던 것을 떠오르게 하는 것으로 여성들의 인격을 무참히 짓밟고 능멸하는 망발이다.

이와 같이 교수라는 자의 망발은 일본 보통국민들이 얼마나 역사치매에 찌들어 있는지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여성을 성노예로 삼았던 군국주의의 여성 멸시의식이 뿌리깊이 박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이런 정신 나간 교수라는 자가 역사교과서 가운데 중세와 현대사를 집필했고 이 교과서를 일본정부가 거리낌 없이 검정.채택했다는 사실이다. 과연 이런 정신 나간 자가 쓴 조작교과서로 어떻게 후손들을 가르치겠다는 것인지, 날조된 교재를 통해 저급.저질교육을 받을 일본 차세대가 어떤 사고를 갖고 성장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해 나갈지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강제 징발 당한 여자들이 전선에서 일본 병사들의 성 노리개가 되어 지쳐 죽어나간 참혹한 역사를 '화장실'에 비유한다면 종전(終戰) 후 미군위안부가 된 많은 일본 여자들은 ‘주둔군의 화장실 역사’라는 말이던가.

◆ 성노예(위안부)가 되는 것은 여성으로서 대출세
일본의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의 핵심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는 ‘위안부가 되는 것은 여성으로서 대출세 역사’라고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있다. 고바야시 역시 역사치매에 푹 빠져 있는 비열한 자이다. 

그는 ‘전쟁론’이란 만화로 일본에서 일약 베스트작가로 발돋움 했다. 만화의 내용은 일제의 과거사를 철저하게 미화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일본은 아시아 침략 전쟁 당시 방어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대미(對美) 개전을 결의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아시아를 구미로부터 해방시켰다. 또한 한국병합은 한국이 원하고 세계가 승인한 합법 행위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승리는 동남아시아 사람들, 나아가서는 인도인들에게도 독립의 꿈과 용기를 북돋웠다. 전쟁 당시 아시아인들이 일제히 일본을 응원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시각은 아시아침략전쟁은 범죄가 아니며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은 전범이 아니라 전쟁영웅이라는 것이다.

꽃다운 나이에 피지도 못하고 영혼이 피로 물든 일본군들의 성노리개로 산화한 여성들을 고바야시는 이토록 비약시키고 있다. 고바야시가 딸이 있다면 딸과 부인을 대출세 시키기 위하여 자위대의 성노예로 보낸다면 고바야시 보다 더 출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쿠노 세이스케(奧野誠亮)
일전에 일본 자민당의 중.참의원 116명은 ‘밝은 일본.국회의원연맹’이라는 단체를 발족시켰다. 그 단체의 회장에 취임한 오쿠노 세이스케(奧野誠亮) 전 법무성 장관은 “위안부 강제연행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상관이 부하가 수십 명의 여성을 강간하는 것을 묵인했을 리가 없다”라고 궤변을 늘어 놓는 등 그 명칭과 동 떨어진 작태를 보였다

일본 민주당
2003년 2월 21일 일본 야당인 민주당의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간사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당의 국민운동위원장을 맡고 있는 오카자키 도미코(岡崎トミ子.사진) 의원의 직무를 당분간 정지한다”고 발표했다. 그것은 오카자키 의원이 일본 국회의원으로서는 맨 처음으로 서울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 출신 할머니들의 집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내린 제재 조치였다. 오카자키의원은 사민, 공산당등과 함께 추진 중인 ‘전시(戰時) 성적 강제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촉진법’을 제정하기 위해 2월12일 서울 주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정신대대책협의회의 항의시위(수요집회)에 참석하여 경과 보고를 했었다. 집회 참가가 문제가 되자 오카자키 의원은 “국회 승인을 얻어 방한했고, 반일 데모에 참가한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으나, 산케이신문을 비롯한 극우 언론 매체들은 이를 끈질기게 문제 삼았었다.

참의원이 정당한 법 입안을 위한 정당한 활동 자체를 비난하고, 일본의 과거 추악한 역사를 들추어 낸다고 하여 직무정지 처분을 내리는 곳이 바로 일본이다. 오카자키의원 본인도 민주당 참의원 의원총회에서 “경솔한 행동을 반성하고 있다.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일본이란 곳은 어디까지 진실이며 개인의 의견을 어디까지 자유롭게 밝힐 수 있는 곳이란 말인가?

日 ‘역사왜곡 없을 것’ 천명
일본은 지난 96년 제52차 유엔인권위에서 ‘여성폭력과 위안부문제에 관한 일본의 정책’이라는 제목의 문건을 전회원국들에게 공식문서로 배포, 군대 성노예를 비롯한 역사적 사실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이를 미래의 세대에게 올바르게 전달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하였다. 유엔인권위 문서(E/CN.4/1966/137) 전문에 따르면 일본은 군대 성노예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교과서에 반영하겠다고 약속한 것은 물론 ‘평화,우정 및 교류제안’을 통한 세부 실천계획까지 제시했었다. 이 문서에서 일본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역사의 사실들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이들을 미래의 세대에게 올바르게 전달하고, 관련국들과 상호이해를 더욱 증진하는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 사과와 참회의 감정을 표현하는 한 방편이 될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또한 일본은 94.8월 발표된 당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의 성명서에 기초하여 ‘평화,우정 및 교류 제안’을 시행한다고 했다.  이 제안은 ‘모든 사람들이 역사의 사실들을 정면으로 직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역사적 문서와 자료의 수집, 역사연구자에 대한 지원을 한 축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은 이 제안의 시행을 위해 향후 10년에 걸쳐 정부예산에서 1천억 엔을 갹출할 계획이며, 1차 회계연도(95.4월~96.3월)에 82억 엔 예산을 집행해 역사연구와 국제교류 증진을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전개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없었다.

유엔 권고 무시
제59차 유엔인권위원회 회의의 ‘여성폭력’에 관한 토의에서 한국 정부가 유엔특별보고관의 권고 불이행에 우려를 표시하고 권고사항을 기초로 긍정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 한데 대하여 오시마 쇼타로 주 제네바 일본 대표부 대사는 “전시 위안부와 관련된 문제를 비롯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야기된 보상문제와 관련해 일본 정부는 관련 국제협약에 따른 의무를 이행했으며 이 문제들은 일본과 한국 사이에 법적으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 며 유엔의 권고까지 무시하고 있다.
그러나 오시마 쇼타로 주제네바 일본 대표부 대사는 “우리의 법적 책임 이행이 전시 위안부로 고통을 받은 사람들의 명예와 존엄에 미친 피해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책임을 면제하지는 않는다”고 알듯 모를듯한 일본 특유의 비급함을 덧붙였다

日최고재판소 “성노예(위안부), 日정부 배상책임 없다” 확정판결
2003년 3월 일본 최고재판소는 이른바 ‘시모노세키 소송’으로, 1998년 5월 야마구치(山口)지법 시모노세키(下關)지부가 아시아침략전쟁 당시의 성노예 문제와 관련하여 종전 후 43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의 국가책임을 인정, 3명의 할머니들에게 각 30만 엔씩 총 90만 엔 위자료 지급 판결에 대한 상고심 재판에서 “일본 정부는 위안부에 대해 보상해줄 필요가 없다”고 원고 패소 판결을 확정했다. 당시 시모노세키 지부는 “일본이 위안부(성노예)에 대한 배상을 해주는 법을 만들지 않은 것 자체가 중대한 인권 침해”라며 일본의 국가 과실을 인정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 사법부는 종군성노예에 대해 배상해주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법 쿠데타’라고까지 불렸으며, 이 판결을 계기로 일본의 성노예 배상 정책이 돌아설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일본 사법부는 끝내 이 판결을 뒤집었다. 2001년 열린 2심 재판에서 일본 히로시마 법원은 1심 판결을 뒤집어 일본 정부의 손을 들어 줬다. 3명의 할머니들에 대한 총 90만 엔 위자료 지급이 아까워서 이 3명의 할머니 마저 죽기를 바라며 시간을 벌겠다는 계산인가 아니면 일본 최고재판소가 시모노세키(下關)지부 판결내용의 일본 글을 읽지 못해 내린 판결인가?

일본 고법, 대만 성노예 손배 항소 기각
도쿄 고등법원은 2004년 2월9일 대만의 일본군 성노예 7명이 제기한 배상 소송 항소를 개정 10초 만에 기각했다. 대만 여성들은 피해 보상으로 각각 1천만 엔(약 1억 원)과 일본정부의 공식사과를 요구했다. 이에 앞서 도쿄 지법은 2002년 10월 똑같은 이유를 제시, 손해배상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쿄 고법의 이시카와 요시노리 판사는 전시 배상문제는 전후 국제조약이나 양국 조약에 의해 해결됐다며 항소를 기각시켰다.

◆ 요미우리TV 여론조사 일방적 취소
2005년 4월 17일 일본 요미우리 TV는 '거기까지 말해 위원회'라는 토론 프로그램은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가입 문제와 '다케시마(독도)의 날' 제정 등으로 중국과 한국에서 반일시위가 열리는 등 주변국의 눈총이 따갑다면서 "일본이 중국과 한국 사이에 안고 있는 것이 종군위안부 문제"라며 "현재 그 존재를 놓고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며 투표를 제안했었다. 17일부터 1주일 일정으로 실시할 예정이었다.

이에 온라인상에는  "더러운 일본과 생활하는 것은 전 세계의 불행" 등 일본의 배상 거부를 격하게 비난하였지만 찬성 댓글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반대로 "전후 식민지 배상을 통해 모두 해결된 것 아닌가" "군대위안부 주장은 중국과 한국의 날조" "자발적인 매춘" 등 반대에 대한 댓글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투표 결과는 찬성이 압도적이었다. 실시 직후부터 '배상해야 한다'는 의견이 80% 안팎으로 치솟아 '배상해서는 안 된다'(20%)를 큰 격차로 따돌리며 줄곧 진행되었다. 우리로서는 당연한 결과였지만 일본으로서는 다소 '의외'의 상황이 연출됐다고 볼 수 있다.
찬성 80%, 반대 20%의 기조가 일관되게 지속되자 방송사측은 오후 들어 "접속이 집중돼 조사결과의 신빙성이 훼손됐기 때문에 찬반표시를 중단한다"는 공고를 내고 일방적으로 투표를 중단했었다.

◆ 기  타
시마무라 요시노부(島村宣伸) 농수산상은 '성노예는 자발적 매춘부'라고 했다. 
2005년 4월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부회장 후지오카 노부카쓰(藤岡信勝) 다쿠쇼쿠(拓殖)대학 교수는 "지금 한국에서 종군성노예(위안부)들이 정기적으로 일본대사관 앞에서 퍼포먼서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북한공작원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라고 주장했다.
2004년 11월 일본 문부과학상 나카야마 나리아키(中山成彬)는 "일본교과서는 극도로 자학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었을 때가 있었다. 겨우 최근 들어 종군위안부라든가 강제연행 같은 기술이 줄어든 것이 정말 다행이다"
2005년 8월 일본열도에 불어 닥친 한류열풍을 시기하여 한국인을 헐뜯는 내용을 담고 있는 만화 ‘혐한류(嫌韓流)’의 작가 야마노 샤린(山野車輪)은 “내 나름대로 조사한 결과 종군위안부 문제는 날조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 날조가 일본에서 시작됐다는 것을 알고 심한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 날조와 거짓이 만연하고 있다는 것에 화가 나서 이 만화를 쓰기로 결심했다”고 주장했다.

2005년 3월 27일 아베 신조(安倍晋三.사진) 前자민당 간사장 대리는 도쿄의 메이지(明治神宮)신궁 회관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성노예(위안부)는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가 지어낸 이야기다. 아사히신문이 이를 먼저 보도해 독주했다. 언론이 만들어 낸 이야기가 밖으로 새 나간 것"이라고 말했다. 요시다는 성노예(위안부) 여성들을 한반도에서 강제 연행에 관여했던 사실을 1980년대 증언하고 참회했던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아베를 비롯한 정신 나간 정치인들의 망언은 끊이지 않고 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성노예 생활

성노예 출신 여성들은 80세가 넘어선 지금도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일본순사에 쫓기고, 성행위를 거부한다며 단도로 목을 찌르고, 영혼이 피로 물든 정신병자 군인들이 은부에 방뇨를 하고, 하루 수십 명씩 성에 굶주린 늑대들에게 유린당하여 밑이 부어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이러는 등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생지옥과 같은 생활을 되 뇌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 여성 대부분은 홀로 생활하였다.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룬 여성들은 과거가 알려져 쫓겨나거나 아이를 낳지 못해 이혼을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또 일부 여성들은 위안소 시절에 얻은 병이 계속 후유증으로 남아 2세가 제2차 질병에 걸리는 기막힌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남자에 대한 불신과 혐오. 인간기피증. 열등감. 피해의식 등으로 정신조차도 온전치 못하여 정신병으로 발전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 여성들은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못하는 것을 천추에 한을 가지고 피를 토하며 죽어가고 있다.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자기자신의 몸이 미친개에 유린당한 그 치욕을 감당하지 못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여성들도 있다. 이들은 고향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리거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치를 떨면서 타국에서 방황하고 있다. 이들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채 아직도 길거리에 내버려져 매일매일 절규하며 죽음과 싸워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성노예 출신 할머니들이 우천에도 불구  하고 광복 58주년을 앞두고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570번째 수요집회

 

20만여 명에 달하는 성노예 출신 여성들은 성노예 출신이라는 수치심에 말 한마디 못하고 각가지 병으로 인하여 단명했다. 현재 생존 성노예 출신 할머니는 한국에는 ‘종군위안부(성노예) 강제연행 인정과 희생자에 대한 손해배상’ 등을 요구하며 매주 수요일 정오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 대사관 앞에서 진행돼 온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공동대표 김윤옥 등.이하 정대협)의 수요시위가 시작된 1992년 1월 8일 현재 약 205명 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북한에는 200여 명 남짓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이 여성들의 사망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비열한 3류 사무라이 나라 일본이 원하는 대로 하루빨리 성노예(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이 뼈가 시리도록 아픈 사연을 담고 모두다 사망하고 나면 섬나라 일본은 또다시 성노예는 없었노라 생떼를 부려 추악한 과거를 잊고자 갈망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가 다 아는 성노예 문제를 일본만 모른다고 생떼를 부리는 것은 성노예 출신 여성들을 2중 학살하는 것이요, 주변국가를 신뢰할 수 없는 국가로 치부하게 되며, 일본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아 역사치매에 걸리게 하여 국제 망나니 짓을 하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일본은 지금도 예전과 비교하여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일본에 일하러 온 아시아계 여성에게 매춘을 강요하고 있고 줄지어 동남아로 섹스관광을 하면서 거들먹거리고 있다. 2003년 9월 중국 광둥(廣東)성의 주하이(珠海)호텔에서 벌어진 사태는 일본이 기이한 성벽(性癖)을 지닌 사이코 집단임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2003년 9월 근원적 구제불능이요 역사치매에 걸린 우매한 일본 남자 380여 명이 중국 광둥(廣東)성의 주하이(珠海) 호텔에 투숙하였다. 이들은 약 5백 명의 중국여성을 한꺼번에 불러 역사상 전무후무한 광란의 섹스파티를 벌였다. 이것은 일본인들이 추악한 ‘인면수심(人面獸心)’ 이라는 사실을 국제적으로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일본은 야쿠자 집단이다

위: 일본군이 성노예 여성을 폭행하여 내장이 파열된 모습

아래: 성노예 여성의 하체를 벗겨놓고 희롱하는 일본군


히로히토 일왕과 일본정부가 공개적으로 추진한 성노예 문제에 대해 일본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지난 96년 제52차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전 회원국들에게 유엔인권위원회 문서(E/CN.4/1966/137) ‘여성폭력과 위안부문제에 관한 일본의 정책’ 이라는 공식문서로 제출했다. 이에 따르면 군대성노예를 비롯한 역사적 사실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이를 교과서에 반영하여 미래의 세대에게 올바르게 전달하는 것은 물론 ‘평화,우정 및 교류제안’을 통한 세부 실천계획까지 마련했다고 했었다. 그러나 비열한 사무라이 나라 일본은 시간이 지나자 그 실천은 개 눈깔 감추듯 감추고 있다. 유엔과 국제기구의 수 차례의 권고 및 판결사항을 한결같이 무시 또는 헌신짝 버리듯하고 있다. "순간적인 위기를 모면하면 그만이다"는 식으로 세계인들을 조롱하고 국제사회에 도전하고 있다.

몇 년 전 오키나와 주둔 미군이 성범죄를 일으켰다 하여 일본열도가 몇 날 몇 일을 들고 일어났었다. 북한이 수십 년 전 일본인을 납치했다 하여 아무 죄도 없는 조총련계 여학생의 치마저고리를 백주대낮 전철에서 칼로 찢고 희롱을 일삼았다. 하지만 누구 하나 제지하지 않는 무법천지가 되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하여 경제 제재를 가하면서까지 가슴 아파하였다. 그러나 꽃다운 나이에 피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져버린 20만여 명에 이르는 성노예 여성들의 죽음과 칼로 가슴을 도려내듯 비통함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前일본 총리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는 “인명은 지구보다도 무겁다”라고 이야기하여 인명의 소중함을 말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일본인에 해당되는 것이지 나머지 諸아시아 국가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들의 인명은 깃털보다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일왕 히로히토가 직접 나서 저질러진 작태에 대하여 양심선언을 하고자 하는 참전 군인들을 공안을 동원하여 감시하고 있다. 일본최고재판소와 정치인들은

▲2004.9.15일 브라질 '일본 이민사 박물관'에서 연설도중 눈물 흘리고 있는 고이즈미 총리

성노예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얼빠진 자들은 성노예가 되는 것은 최고의 출세라고 지껄이고 있다. 성노예 피해 할머니들의 '수요 집회'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현직 참의원에게 당직 직무정지 처분을 내렸다. 집회에 참가하는 할머니들을 북한 공장원이라는 등 야쿠자집단도 하지 않는 비열한 3류 일본몽키 집단의 한심한 패거리 형태를 보이고 있다.

2003년 6월 자민당 행정개혁추진본부장인 오타 세이이치(太田誠一)는 일본 유명 대학 학생들의 집단 강간사건과 관련, “집단 강간을 하는 사람은 아직 원기 왕성해서 좋다. 정상에 가까운 것 아니냐”고 정신병자와 같은 망발을 지꺼렸다. 그리고 모리 요시로(森喜郞) 전 총리라는 자는 “아이도 못 낳는 여자가 자유를 구가하고 즐기며 사는데, 나이 먹은 후에는 세금으로 돌봐주는 것이 이상하지 않나”등 망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여성에 대한 일본국민들의 평균적인 생각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들이다.

반면 독일은 나치독일의 부도덕한 전쟁범죄를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수장은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있다. 그리고 법률까지 규정하여 국가 차원에서 규탄하고 있다. 아데나워 초대 독일총리는 “신독일과 독일 국민은 유대인에 대한 범죄를 인정하고 그들에게 물질적으로 배상할 의무가 있으며, 모두가 승복할 만큼 나치 범죄와 철저히 갈라서야 한다”고 말했다. 또 브란트 총리는 “역사를 잊는 사람은 영혼이 병든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지금까지 억울한 대상이 없도록 배상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소리의 화합이 이루어지되 각 단원은 각자의 악보에 의거 각자의 음과 색깔을 내어야 한다. 그러나 일본은 마치 지휘자가 검을 휘두르며 모든 단원이 똑 같은 소리, 똑 같은 생각을 가지도록 종용하는 광란의 집단과 같다.

역사에 비겁자가 되지 말자.

나무는 잎이 떨어지는 것을 원망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그 잎을 토대로 겨울을 나고 새로운 미래와 성장의 자양분을 얻는다. 그러나 비열한 3류 사무라이 나라 일본은 위안부라는 미명 아래 세계여성을 성노예로 무참히 짓밟아 놓고도 반성은 커녕 거짓으로 변명하기에 급급하고 있다. 일본국민들을 역사치매에 걸리게 하고 상대방 국가를 비하하여 희열을 즐기는 정신병자들의 집단과 같이 행동하고 있다.

일본은 국제사회 및 유엔의 성노예 문제 권고를 무시하면서도 세계평화 운운하고 있다. 일본은 독일과 프랑스와는 달리 미국의 요청에 대해 일본헌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이라크에 파병했다. 총리란 자는 미국과의 관계만 돈독하면 됐지, 유엔은 힘도 없고 유엔의 힘을 빌리지도 않을 것이라고 지껄이면서도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진출하고자 로비하고 있다. 비열한 사무라이들의 상투적인 전법이다.

일본과 고이즈미 총리의 이러한 처사에 대해 간 나오토(菅直人) 前민주당 대표가 일본은 ‘금붕어의 똥’ 처럼 미국의 꽁무니만 따라다닌다고 비판했다. 2004년 6월 미국을 방문한 고이즈미 일본총리는 미국에 대하여 ‘금붕어의 똥’ 그 이상임을 밝히는 발언을 했다. 그는 부시

▲중국과 미얀마 국경지대에 버려진 한국인 성노예 여성들의 최후의 모습(나눔의집 캡쳐)

대통령의 애견 ‘스폿’ 사망에 대해 “스폿 사망에 얼마나 슬프십니까?”라고 애도를 표시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애견 ‘바니’ 근황까지 문의하는 작태를 보였다. 성노예 할머니들의 한 맺힌 요구에 대하여 일언반구 반응도 없는 그가 미국대통령의 애견 죽음에 정중한 애도를 표시하는 것이 오늘의 일본 총리다.

하지만 비열한 3류 사무라이 나라 일본은 앞에서는 성노예와 같은 더러운 역사가 없었다고 변명하면서도 뒤로는 국가범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아시아여성기금’이라는 단체를 동원하여 성노예 출신 할머니들에게 개인배상을 시도하고 있다. 2001년 8월 24일 홍콩 신문 [대공보]는 일본이 중국의 흑룡강성,중녕현에 거주하는 일제시대 한국인 성노예 출신 할머니들에게 '과거 성노예(위안부)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더 이상 발설하지 않느다면 거액을 주겠다'며 이들의 입을 막으려 했다가 실패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일본정부를 상대로 배상소송을 포기하게 하려는 일본정부의 사주 가능성도 시사했다. 그런데 주중 한국인회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전했다.

이러한 비열한 작태는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성노예 출신 여성들의 약점을 잡는 것으로 일본인 특유의 비열한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바로 돈이면 범죄도 무마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섬나라 소인배 일본의 본심이다. 국가적 책임을 거부하고 색안경을 쓴다고 더러운 역사가 덮어지지는 않는다. 색안경을 쓴다는 것은 오히려 더욱 많은 세계인들의 이목을 끌듯이 일본은 이러한 비열한 작태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 역사란 이러한 일본의 행동을 방관자적 자세로 보지 않는다. 일본은 하루빨리 성노예에 대한 실상을 낱낱이 밝혀 성노예 여성들의 피맺힌 한을 풀어 주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꽃다운 나이에 성노예로 끌려간 순박한 여성들은 피에 물든 일본군인들 앞에서 처참하게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다. 반성하지 않는 오늘의 일본인들로부터 또 다시 버림받고 있다.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딸, 손녀들이 반성하지 않는 비열한 일본인들의 군화 밑에 또다시 밟히지 않게 하려면 일본을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다시는 이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합금이 순금보다 강하듯 합심하여 일본에 대항해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일본의 정치지도자라는 자들이 성노예 피해자들을 북한 공작원, 매춘부로까지 모독하는 상황에서 무분별하게 일본제품을 구매하여 일본인들의 지갑을 두텁게 하는데 지속적으로 일조하고, 일본의 지갑 두께에 현혹되어 과거 그들의 역사를 묵인한다면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또 다시 초래할 뿐이다.

일어나라! 또 다시 일본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은 자들이여.
성노예 사건은 전설 속의 이야기가 아니다. 정신병자 일본에 의거 저질러진 우리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요, 옆집 친구 할머니 이야기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눈물 흘리며 아리랑을 부르며 숨져간 이들의 한 맺힌 삶을 우리 가슴 속 깊이 묻어 이들의 명예회복에 앞장서야 한다. 우리 후손들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일본의 처사에 행동하지 아니하고 침묵하는 자, 그대는 과거역사에 대한 방관자요, 현재에 대한 침묵자며, 아들딸. 손자 손녀에 대한 미래의 비겁한 자이니라!

 

 

[EBS] 시대의 초상 - 위안부라 하지 마라, 이용수

 

 

 

 

 

 

출처 : mars의 진실 찾아 떠나는 세상
글쓴이 : 화성인 mar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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